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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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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3회 작성일Date 26-04-1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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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향유 옥합을 기꺼이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린 여인의 이야기는 사복음서 전체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니 그 가격이 삼백 데나리온이면 거의 노동자 한 명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니 결코 적지 않습니다.
이를 목격한 제자들은 분개하며 명백한 ‘허비’라고 질타를 가합니다(마 26:8).
‘허비’라고 번역된 ‘아폴레이아’는 대부분 ‘심판으로 인한 파괴와 멸망’(마 7:13; 벧후 2:1; 계 17:8)으로 번역되는 다소 과격한 용어입니다.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제자들의 눈에는 일순간에 거액의 돈이 철저히 파멸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완전히 다르십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십니다.
성찬식이 주님을 기억케 한다면 이 명령은 이 여인의 섬김을 기억케 합니다. 이보다 더한 칭찬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하였다는 모세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은 다윗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여인을 이렇게까지 칭찬하시는 이유일까요? 답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까지 무리를 향하여, 제자들을 향하여 거듭, 거듭 말씀하신 것은 고난 당하심과 죽임 당하심 그리고 삼 일만에 살아나실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일까요? 불변의 복음이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자신을 다 깨뜨리는 심판을 통해 멸망으로 나아가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파괴하시는 이 죽음은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대급 낭비인 것입니다.
여기 향유를 깨뜨려 ‘허비’한 행동은, 인류의 ‘멸망(아폴레이아)’을 짊어지기 위해 스스로를 깨뜨리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고합니다.
제자들은 물질의 경제적 가치가 사라지는 것을 ‘멸망’이라 보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란 멸망을 통해 인류를 ‘심판의 멸망’에서 구원하는 ‘거룩한 경제학’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감히 누가 예수님의 이 죽음 앞에서 자신의 것을 다 깨뜨려 드리는 것을 낭비라고 질책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파멸이 아닌 ‘사랑의 낭비’인 것입니다.

    이 여인의 헌신이 ‘사랑의 낭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대상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가장 위대한 사랑의 낭비’를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피조물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비경제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계산기를 두드렸으나 여인은 자신의 심판을 대신하여 멸망을 짊어지시는 주를 향하여 심장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행하신 최고의 낭비인 십자가 덕분에 우리가 값을 계산할 수 없는 영생이라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우리를 위한 성찬의 깨어짐과 우리의 주님을 위한 옥합의 깨어짐이 만나는 곳에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효율성을 따지는 ‘계산’이 아니라, 나를 위해 전부를 허비하신 그리스도께 나의 전부를 쏟아붓는 ‘사랑의 낭비’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