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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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970회 작성일Date 21-05-08 17:11본문
고난주간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며 예수님의 고난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속에는 그 고난을 가한 사람들의 비열함과 잔혹함을 넘어서 용서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운 죄악 된 모습들이 여실이 드러납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제자들도 예외 없이 포함됩니다. 그 제자들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베드로라는 점에서 그의 말과 행동은 곧 제자들 그룹을 대표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을 때 베드로가 그 뒤를 따라갑니다. 하지만 “멀찍이 따라갔다”라고 합니다(마 26:58; 막 14:54; 눅 22:54). 가까이서 따라가면 동일한 핍박과 고통 그리고 심지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사명을 감당케 하시려는 목적이셨습니다(막 3:14-15). 그런데 마태복음은 그러한 일을 수행케 하시기 위해 제자들이 걸어야 할 삶의 길을 낱낱이 제시해 주십니다.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시며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이니 염려치 말라 하십니다. 이는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춘 삶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이 있어도 그것에 의지를 두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전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공회에 넘겨질 수 있고, 회당에서 채찍질 당할 수 있으며,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 속에서 조롱과 박해, 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마 10:8-23). 이런 삶의 길은 예수님이 걸으셨고, 겪으셨던 것입니다. 결국 제자도란 주님과 함께하여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견 예수님은 너무 가까이에서 따르다간 희생하고,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부담스런 분으로 보입니다. 부자 관원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하신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예수님과 함께 했다가는 아무것도 남아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입니다. 그렇지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예수님은 잊으려 하면 할수록 그리움이 더욱더 사무치게 하는 ‘멀리 하기에도 너무 힘든 당신’입니다. 세상이라는 삶의 전쟁터에서 예수님을 가까이하면 놓아야 할 것이 점점 더 많아지고, 멀리하면 주님을 향한 갈증과 그리움이 결코 채워지지 않는 빈방으로 남아 존재의 의미가 상실됨을 절감합니다. 어째야하나? 그래서 베드로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당당하게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외치고(눅 22:33), 세상의 한 가운데서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나는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담대하고, 용감하게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를 목놓아 부르짖으며 주님께 우리의 결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며 조롱하는 세상 속에서는 세상의 방식에 적당히 묻혀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희망은 부활하신 후 그렇게 주를 부정했던 제자들에게 오셔서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다시 소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주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덕분에 우리에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셨던 분이 이제는 ‘멀리 하기엔 너무 가까운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으로 인해 놓으면 놓을수록 풍성해지는 삶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김재구 목사
김재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