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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나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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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077회 작성일Date 21-04-0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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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극진한 대접을 받은 나귀 중 한 마리를 들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하여 타고 가신 새끼 나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앞에 겉옷을 깔고, 나무 가지를 베어서 길에 펴서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화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걸음걸음을 칭송합니다. 이 땅에 태어나 그와 같은 환호는 받아본 적이 없고, 그저 이제나 저제나 언제 어미 나귀처럼 짐을 지게될까 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과분한 환대와 찬미에 자칫 착각에 빠지기 쉬운 순간입니다. 나귀를 풀어서 데려온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그 짧은 길을 잘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으로 이미 500여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의 선포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한갓 나귀일 뿐임에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이미 내정되어 있는 삶이라는 것이요! 사람 부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나귀가 착각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향하여 환호하고, 칭송을 돌리는 것인줄 알고 펄쩍거리며, 흥분해서 날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렇게 날뛰는 바람에 예수님은 나귀 등에서 떨어지고 마실 것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귀는 그렇게 한 바탕 흥분된 축제에 신바람 나서 우쭐거리며 즐기다가 곧 느끼게 되겠지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하여 환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태우고 가는 분을 향한 것이었다는 사실을요. 왜냐하면 신나게 환호와 칭송에 응답하여 소리지르며 날뛰는 자신을 향하여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등에서 떨어진 그 분을 향하여 모여드는 것이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상 시나리오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사람의 세계에서는 실제가 된다는 점이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의 나귀처럼 등에 예수님을 태우는 가시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있으니 우리 마음으로는 이미 등을 내어드려 태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도 나귀와 같이 예수님을 태우고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해 놓으신 그 길을 짧든지, 길든지 관계없이 전심을 다해 받들며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가는 그 길에 사람들이 겉옷을 깔고, 나뭇가지를 베어 펴며 환호하고, 칭송하며 극진히 환대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러한 환대를 자신을 향한 것으로 착각하여 우쭐대며 흥분하여 몸과 마음을 한껏 흔들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면 주님이 떨어지십니다. 그렇게 주님이 떨어지셨음에도 사람들이 자신을 향하여 열광하며, 환대하면 이미 같이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이 떨어진 주님, 문밖에 계신 주님을 향하여 옮겨지고, 그 주님을 향한 갈증으로 간절히 찾는 일이 벌어진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귀일 뿐인데 특별한 무엇이 된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오해하게 만들어, 주님의 영광을 가로챔으로 살아계신 주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악행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부르셨는데 도리어 “주를 쓰겠다”고 그 위에 올라타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겠습니다. 은혜의 십자가로 죄사함 받은 우리를 향해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음성이 들릴 때마다 즉시 응답하여 우리의 등을 기꺼이 내어드리고 말씀을 성취하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또다시 다가온 이 종려주일에 우리 모두 함께 겸손히 나귀의 위치로 돌아가 주님을 태우고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김재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