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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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136회 작성일Date 21-01-23 16:33본문
불안한 인생길을 살아가노라면 뭔가 삶에 보증이 될 만한 것을 찾는 것이 사람의 심정입니다. 그것에 기대어 심리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코로나 시절에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거대 온라인 쇼핑몰 중의 하나인 쿠팡에는 코로나 막는 부적이 스티커, 양말, 수건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제작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코로나 방패기도가 들어있는 책은 물론 주기도문이 새겨진 행운 팔찌도 매매가 됩니다.
사람의 불안감을 이용하는 상술이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부적으로 둔갑시키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 시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상황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만연해 있는 그러한 의식구조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오는 무리를 보며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고 표독스럽게 외칩니다.
이것은 곧 ‘세례’라는 의식에 기대어서 또 하나의 삶의 면죄부를 받으려는 그들의 속셈을 간파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도 동일한 유대인으로서 그동안 유대인들이 기대어 왔던 심리적인 의지처가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처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에 다른 것을 찾아 삶의 보증을 삼으려 하는 것까지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이 부적처럼 사용했던 삶의 보증은 바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눅 3:8)는 자부심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선택된 백성이다”라는 긍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칭호는 이미 탄생의 순간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 안에 있는 선민의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과는 다른 표준으로 자신들을 다루고 있고, 심지어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심판이 면제된다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증표면 선민의 특권을 누리며 세상에서 호령하며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선민이라는 증표가 분명히 있음에도 로마라는 이방인의 압제 가운데 거하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삶의 정황이 이들의 고뇌였고,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갈등과 고뇌 속에 거하는 이들에게 어디에선가 새 날이 온다는 선포가 들려옵니다.
“메시야가 오시고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목도하는 날이 온다”라는 복음을 선포하는 세례요한을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세례를 받으려 합니다.
이들에게는 세례라는 의식은 복음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새 시대에 구원을 보증받는 또 하나의 증표라 여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 또한 부적이요, 보증으로만 여겼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세례의식이 결코 진노를 피하는 길이 아니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면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그 구체적인 예는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도 그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에서 그것이 손가락질받는 세리이든, 두려움의 대상인 군인이든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증스러워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서 있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세리는 바람직한 본이 되는 세리가 되고, 군인 또한 그와 같은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 뒤에 숨어서 삶의 보증을 받은 듯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세례 받았고,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 이상의 공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면죄부로 여기며 생활하지는 않습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면 행함으로 열매 맺는 삶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김 재 구 목사
그러다보니 코로나 시절에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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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심지어 코로나 방패기도가 들어있는 책은 물론 주기도문이 새겨진 행운 팔찌도 매매가 됩니다.
사람의 불안감을 이용하는 상술이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부적으로 둔갑시키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 시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상황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만연해 있는 그러한 의식구조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오는 무리를 보며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고 표독스럽게 외칩니다.
이것은 곧 ‘세례’라는 의식에 기대어서 또 하나의 삶의 면죄부를 받으려는 그들의 속셈을 간파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도 동일한 유대인으로서 그동안 유대인들이 기대어 왔던 심리적인 의지처가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처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에 다른 것을 찾아 삶의 보증을 삼으려 하는 것까지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이 부적처럼 사용했던 삶의 보증은 바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눅 3:8)는 자부심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선택된 백성이다”라는 긍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칭호는 이미 탄생의 순간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 안에 있는 선민의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과는 다른 표준으로 자신들을 다루고 있고, 심지어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심판이 면제된다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증표면 선민의 특권을 누리며 세상에서 호령하며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선민이라는 증표가 분명히 있음에도 로마라는 이방인의 압제 가운데 거하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삶의 정황이 이들의 고뇌였고,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갈등과 고뇌 속에 거하는 이들에게 어디에선가 새 날이 온다는 선포가 들려옵니다.
“메시야가 오시고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목도하는 날이 온다”라는 복음을 선포하는 세례요한을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세례를 받으려 합니다.
이들에게는 세례라는 의식은 복음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새 시대에 구원을 보증받는 또 하나의 증표라 여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 또한 부적이요, 보증으로만 여겼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세례의식이 결코 진노를 피하는 길이 아니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면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그 구체적인 예는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도 그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에서 그것이 손가락질받는 세리이든, 두려움의 대상인 군인이든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증스러워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서 있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세리는 바람직한 본이 되는 세리가 되고, 군인 또한 그와 같은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 뒤에 숨어서 삶의 보증을 받은 듯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세례 받았고,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 이상의 공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면죄부로 여기며 생활하지는 않습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면 행함으로 열매 맺는 삶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