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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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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563회 작성일Date 21-10-08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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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가며 ‘동행’이라는 단어가 참 정감 있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특히나 ‘혼밥, 혼술’ 등 개인주의가 삶의 당연한 문화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이 시대에 이 단어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단순히 “일정한 곳으로 길을 같이 가거나 오거나 하는 행동이나 혹은 사람”을 뜻할 뿐임에도 그 단어가 주는 위로가 있습니다. 한때 가사 내용 중에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라는 구절을 입으로 흥얼거리게 하는 ‘동행’이란 제목의 가요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같이 함께’라는 동일한 뜻의 단어가 연거푸 사용된 것을 보면 점점 사라져가는 동행의 정감을 되살리고 싶은 염원으로 느껴져 가슴이 짠해집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동행이라는 단어는 올바르게 삶으로 반드시 살려내야 할 요소라는 점에서 생명처럼 소중합니다. 한글 성경에서 동행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에녹의 이야기입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2-24). 처음 등장한 동행이란 단어에 나타난 대상이 누구인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동행해야 할 분이십니다. 이러한 동행의 의미와 동행해야 할 분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대표적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광야를 헤매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길을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그 거친 곳에서 에녹의 동행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유다 광야에 있을 때 기도하며 노래한 시편 63편에는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나” 그를 공격하는 자들은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이 세상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기에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를 가까이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따른다(다바크)”는 것이 정확하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면 한 가지 좋은 예가 있습니다. 동일한 단어인 히브리어 ‘다바크’가 사용된 곳인데 바로 룻의 이야기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자신을 떠나 그의 나라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자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붙좇았다’라고 합니다(룻 1:14). 여기서 ‘붙좇았다’로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어 ‘다바크’입니다. 룻기는 붙좇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생하게 설명해 주는데 그것은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며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이처럼 가까이 따르고, 붙좇는 동행은 가는 곳, 머무는 곳이 동일하고, 그 백성이 되고, 신앙도 하나가 되며, 죽는 곳에서 함께 묻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살아서의 모든 길과 죽는 장소까지도 동일하여 삶도 죽음, 그 어떤 것도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임을 깨닫게 합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함께하시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음성에 순종하여 그 뒤를 따르는 제자도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며, 붙좇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우리도 가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우리도 머물고, 예수님의 백성이 우리의 백성이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예수님이 죽으신 곳에서 우리도 죽는 것입니다. 이 동행은 다른 말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