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늘 영광을 버리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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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867회 작성일Date 21-06-12 16:02본문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는 히브리서의 시작(1:1-2)은 인류 역사에서 완전히 다른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었다는 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는 두꺼운 휘장으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며 우리가 그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복음 중의 복음인 것입니다(히 10:20). 이처럼 죄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차단시켜 하나님께서 주기를 소망하신 생명력 있는 교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세월을 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모세에게도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고 하시며 손으로 가리고 등만 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불과 구름과 흑암 가운데서 목소리만으로 십계명을 선포하셨음에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듣고 자신들에게 전해주길 간구합니다(출 20:18-21; 신 5:22-29). 그 목소리를 더 들으면 죽을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광채와 성전에 가득한 옷자락만 보고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1-5)라고 탄식합니다. 부정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임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정결한 존재들인 스랍들도 감히 대면할 수 없어 여섯 날개의 두 개로 얼굴을 가리고, 두 개로 발을 가리고, 두 개로만 날며 외치는 ‘거룩하다’의 삼중주를 통해 역력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천상의 존재들인 스랍들도 직접 대면하기 힘든 거룩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 또한 궁창 위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뵙는데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 밖에는 볼 수가 없었으며 그 얼굴은 결코 뵐 수가 없었습니다(겔 1:26-28). 하나님께서 간간이 족장들에게 자신의 영광의 본체를 숨기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적이 있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나그네의 모습으로(창 18:1-2), 야곱에게는 함께 씨름하는 대결자의 모습으로(창 32:24) 잠깐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현현들이 사람이 견딜 수 있고, 죽지 않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된 인생들을 만나주셨다는 점에서 은혜인 것입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관계의 장벽을 끝내시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성육신의 은혜인 것입니다. 죄된 인생들이 하나님과 함께 생활함에도 죽지 않을 수 있었고, 함께 동거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인함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심에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우리와 같이 되신 것입니다(빌 2:6-7). 이 은혜의 크기를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광의 본체가 인간의 육신이라는 한계 속에 기나긴 세월 동안 제한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어려움일까요? 사람이 개미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보다 수억, 수조만 배는 더한 제한이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낮아지심의 겸손이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음에도 죽지 않는 길을 열었습니다(요일 1:1). 그리고 마침내 성육신하신 주의 십자가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새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늘 영광을 버리신 것이 주는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는 가지가 되는 하나 됨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성령강림시대가 얼마나 소중한 시대인지를 깨닫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