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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반대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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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688회 작성일Date 21-12-0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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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이 눈앞에 다가오며 어떤 감사가 있었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다 하게 우리 마음속에서 감사 거리가 선뜻 떠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많은 것을 조목조목 들어서 보란 듯이 번듯한 감사목록을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을 허락하신 것 감사, 가족을 지켜주신 것 감사, 부족함 없게 하신 것 감사, 좋은 교회를 허락하신 것 감사, 좋은 성도님들과 함께하게 하신 것 감사 등등등.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으니 일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사 거리들을 이렇게 나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에 박힌 전시용 감사가 아니라 정말 마음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기에 우리 자신을 향해 진솔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감사가 저절로 우러나오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의 반대를 살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맴돌고 있을지도 모르는 감사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원망, 불평, 탄식’이라는 단어들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러한 단어들은 오히려 감사를 회복케 하는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정말 감사의 반대말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 이유를 시편을 통해 살펴보면 이 세 가지 요소들이 수없이 반복되며 나타나고 있는데 결코 그러한 상태로 결론에 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라는 호소를 통해 탄식의 깊이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22:1)라는 말을 통해 심각한 원망과 불평까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응답으로 인하여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22:22)라는 감사 찬양으로 그 결론에 이른다는 점에서 감사의 반대말이기보다는 감사를 회복케 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원망과 불평 탄식을 쏟아 붓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해결한다 해도 일시적인 미봉책에 그칠 뿐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해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원망, 불평, 탄식은 감사를 회복하는 길이 되기에 감사의 반대말이기보다는 감사로 이끄는 말이며, 상태라는 것이 더 정확한 정의일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마음에서 감사를 잊게 만들고, 회복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치명적인 반대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요즘 즐겨 부르는 한 찬양곡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바로 ‘은혜’라는 찬양입니다. 그 시작은 이렇습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은혜’는 곧 ‘감사’의 마음을 가득하게 하는 근본이 됩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감사로 승화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상쇄해 버리고도 남는 위력을 가진 한 단어로 인한 것입니다. 은혜만큼 반복해서 나오는 ‘당연’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받아,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자리 잡으며, 완고하고, 인색하며, 교만해집니다. ‘당연’이 앞서가면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지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라는 것을 상기하고, 또 상기하면 ‘당연’은 ‘순종’과 연결되어 ‘당연한 순종’이 되어 따라올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