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고함의 근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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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906회 작성일Date 25-07-26 16:27본문
계시록에는 순차적으로 일곱 인의 봉인이 떼어지고, 일곱 나팔이 울려 퍼지며
마침내 마지막인 일곱 대접이 쏟아질 준비까지 마쳐진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심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 정도면 그래도 자신들의 방식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을 직시하고
인생을 능가하는 세상의 주권자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의 전환이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고함의 끝판왕인 듯이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마지막 일곱 대접이 쏟아짐에도 회개는커녕
오히려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계 16:9).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돌이킬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실제 삶 속에서도 이런 일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지인이 갑작스레 암 진단, 그것도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중
임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가 되었고 간절한 맘으로 함께 만나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을 여러 차례 전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어떤 기도도 받고 싶지 않다는 전갈만 전해왔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바라보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람이 끝까지 완고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래도 사람이 마지막이 다가오면 마음이 여려지고,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 될 터인데 어찌 끝까지 이렇게 완강할까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구약과 신약 속에 부지기수로 등장합니다. 사람의 완악함과 강퍅함이 결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국으로 향할 때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죄악으로 인해 어느 정도로 완강한지를 섬뜩할 정도로 강력하게 말씀하심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우리는 압니다. 아프리카 구스인이 그 피부색을 바꿀 수 없고, 표범이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요.
그럼 이스라엘도 도저히 불가능한 지경까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고 또 보내셨고(렘 7:25; 29:19; 35:15). 마지막 시점에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까지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유대인들을 향하여 끝까지 구원하시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안타까운 외침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계시록의 성령님의 역사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완고함은 삼위 하나님을 넘어서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인생이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극심한 심판의 상황에 절대자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가 아닌 오히려 비방한다는 것은
‘하나님 같이’를 넘어서 ‘하나님 위에’ 서려는 오만함이 역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 16:18)이란 말씀처럼 그 완고함의 근본에는 인간의 교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기는 길은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길만이 완고함을 대체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마침내 마지막인 일곱 대접이 쏟아질 준비까지 마쳐진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심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 정도면 그래도 자신들의 방식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을 직시하고
인생을 능가하는 세상의 주권자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의 전환이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고함의 끝판왕인 듯이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마지막 일곱 대접이 쏟아짐에도 회개는커녕
오히려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계 16:9).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돌이킬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실제 삶 속에서도 이런 일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지인이 갑작스레 암 진단, 그것도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중
임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가 되었고 간절한 맘으로 함께 만나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을 여러 차례 전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어떤 기도도 받고 싶지 않다는 전갈만 전해왔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바라보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람이 끝까지 완고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래도 사람이 마지막이 다가오면 마음이 여려지고,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 될 터인데 어찌 끝까지 이렇게 완강할까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구약과 신약 속에 부지기수로 등장합니다. 사람의 완악함과 강퍅함이 결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국으로 향할 때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죄악으로 인해 어느 정도로 완강한지를 섬뜩할 정도로 강력하게 말씀하심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우리는 압니다. 아프리카 구스인이 그 피부색을 바꿀 수 없고, 표범이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요.
그럼 이스라엘도 도저히 불가능한 지경까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고 또 보내셨고(렘 7:25; 29:19; 35:15). 마지막 시점에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까지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유대인들을 향하여 끝까지 구원하시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안타까운 외침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계시록의 성령님의 역사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완고함은 삼위 하나님을 넘어서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인생이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극심한 심판의 상황에 절대자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가 아닌 오히려 비방한다는 것은
‘하나님 같이’를 넘어서 ‘하나님 위에’ 서려는 오만함이 역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 16:18)이란 말씀처럼 그 완고함의 근본에는 인간의 교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기는 길은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길만이 완고함을 대체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