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유일한 중보자라는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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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937회 작성일Date 25-07-04 16:36본문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중보자의 사명에 대하여 점점 더 깊은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중보자라는 의미이니 우리가 흔히 쓰는 ‘중보기도’라는 말도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존재도 구원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주의 증인은 예수님을 대리하는 것이고, 대리하노라면 주님의 마음을 전하며 중재해야 하는 사명도 포함되어 있기에 중보라는 단어가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생인지라 각자의 감정이 있고, 각 사람에 대한 나름의 판단이 선입견처럼 들어있을 때가 많습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해서는 그 안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의 골이 패여 있어 판단력에 장애가 생기고, 그 말을 곡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전달할 때 중요하게 전해야 할 부분은 놓치게 되고, 가벼이 다루어야 할 부분을 심각하게 만들어 사람 사이에 오해를 조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전하는 사람의 감정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우연히 생긴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각 사람을 바라보는 감정선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족 같은 사람을 대할 때, 그저 안면 정도만 있는 사람을 대할 때,
아니면 악감정의 골이 패인 사람을 대할 때 각 사람이 정확하게 동일한 말을 할지라도 우리의 듣는 귀가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중보자로서 바라보아야 하며,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왜 그럴까요? 답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가장 바르게 증거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가장 온전하게 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태도에 상관없이 자신이 온 것은 섬기려 하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음을 전하며 자신의 감정은 철저히 빼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결코 저버리지 않기 위해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쏟아부으며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자신의 감정, 꿈, 계획, 육체까지도 모조리 하나님의 뜻에 갈아 넣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사람들을 향한 어떤 악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에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게 자신을 온전히 비워 우리를 위해 중재하셨습니다.
우리 앞에서는 아버지 편, 아버지 앞에서는 우리 편이 되셔서 화해를 이루어주시고, 연합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일한 중보자라고 하는 이유는 이렇게 완전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보의 직책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하여 양자의 화해와 연합을 이루는지, 아니면 오히려 더 간극을 벌리고 있는지를 반드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김 재 구 목사
그리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중보자라는 의미이니 우리가 흔히 쓰는 ‘중보기도’라는 말도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존재도 구원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주의 증인은 예수님을 대리하는 것이고, 대리하노라면 주님의 마음을 전하며 중재해야 하는 사명도 포함되어 있기에 중보라는 단어가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생인지라 각자의 감정이 있고, 각 사람에 대한 나름의 판단이 선입견처럼 들어있을 때가 많습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해서는 그 안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의 골이 패여 있어 판단력에 장애가 생기고, 그 말을 곡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전달할 때 중요하게 전해야 할 부분은 놓치게 되고, 가벼이 다루어야 할 부분을 심각하게 만들어 사람 사이에 오해를 조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전하는 사람의 감정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우연히 생긴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각 사람을 바라보는 감정선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족 같은 사람을 대할 때, 그저 안면 정도만 있는 사람을 대할 때,
아니면 악감정의 골이 패인 사람을 대할 때 각 사람이 정확하게 동일한 말을 할지라도 우리의 듣는 귀가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중보자로서 바라보아야 하며,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왜 그럴까요? 답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가장 바르게 증거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가장 온전하게 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태도에 상관없이 자신이 온 것은 섬기려 하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음을 전하며 자신의 감정은 철저히 빼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결코 저버리지 않기 위해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쏟아부으며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자신의 감정, 꿈, 계획, 육체까지도 모조리 하나님의 뜻에 갈아 넣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사람들을 향한 어떤 악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에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게 자신을 온전히 비워 우리를 위해 중재하셨습니다.
우리 앞에서는 아버지 편, 아버지 앞에서는 우리 편이 되셔서 화해를 이루어주시고, 연합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일한 중보자라고 하는 이유는 이렇게 완전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보의 직책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하여 양자의 화해와 연합을 이루는지, 아니면 오히려 더 간극을 벌리고 있는지를 반드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김 재 구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