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이 제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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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58회 작성일Date 24-12-27 17:02본문
2024년이 역사가 되며 새해에 길을 내어줍니다. 우리는 새해에도 변함없이 순례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먼 길을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이든, 함께이든 중요한 것은 인생은 속도보다는 방향이라는 전제입니다.
빨리 가려하든, 천천히 가려하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의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도착해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정이 이미 시작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은 참 멀고도 험한 길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닦여진 길이며,
그 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걷는 길의 방향 곧 목적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평생을 걸어야 합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분명하면 경로 재설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주시려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이 있다면 누가, 누구에게 맞추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에는 환호성을 지르며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에는 많은 의문부호를 달며 주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도 한 단어로 바꾸면 동행입니다.
이렇게 동행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짐승의 우릿간 구유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탄생을 천지창조의 장엄한 서사시로 선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이렇게 우릿간의 구유로 오신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영광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함께하시려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임재하신 그 말씀이 우리를 향하여 선포하십니다. “나를 따르라(요 1:43).” 이 말씀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동행에는 반드시 맞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 길을 가기 위해 함께 나섰는데 마음이 맞지 않으면 결코 함께 완주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를 통한 말씀이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
이렇게 동행하기 위해서는 일치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각 사람마다 생각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가면 두 가지의 뜻이 드러날 것이고, 세 사람이 함께 가면 세 가지의 뜻이 부딪칠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듯이
함께 가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의 뜻이 충돌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름에 들어 있는 정체성답게 사람의 숫자에 관계없이 ‘그리스도’가 정신이며, 삶이며, 뜻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여정을 완주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 곧 주와 동행하는 사람은 제자입니다.
그래서 동행은 곧 제자도로 그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먼 길을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이든, 함께이든 중요한 것은 인생은 속도보다는 방향이라는 전제입니다.
빨리 가려하든, 천천히 가려하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의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도착해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정이 이미 시작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은 참 멀고도 험한 길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닦여진 길이며,
그 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걷는 길의 방향 곧 목적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평생을 걸어야 합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분명하면 경로 재설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주시려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이 있다면 누가, 누구에게 맞추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에는 환호성을 지르며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에는 많은 의문부호를 달며 주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도 한 단어로 바꾸면 동행입니다.
이렇게 동행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짐승의 우릿간 구유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탄생을 천지창조의 장엄한 서사시로 선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이렇게 우릿간의 구유로 오신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영광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함께하시려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임재하신 그 말씀이 우리를 향하여 선포하십니다. “나를 따르라(요 1:43).” 이 말씀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동행에는 반드시 맞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 길을 가기 위해 함께 나섰는데 마음이 맞지 않으면 결코 함께 완주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를 통한 말씀이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
이렇게 동행하기 위해서는 일치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각 사람마다 생각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가면 두 가지의 뜻이 드러날 것이고, 세 사람이 함께 가면 세 가지의 뜻이 부딪칠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듯이
함께 가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의 뜻이 충돌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름에 들어 있는 정체성답게 사람의 숫자에 관계없이 ‘그리스도’가 정신이며, 삶이며, 뜻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여정을 완주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 곧 주와 동행하는 사람은 제자입니다.
그래서 동행은 곧 제자도로 그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