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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보다 못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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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성근 댓글 1건 조회Hit 1,715회 작성일Date 17-11-28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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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오랜만에 아내와 둘이서 무작정 걷다가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하는 곳에서 외식을 하고 왔다. 카페에도 갔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1딸이 태어난 이후 처음일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에는 아내와 단둘이 약간의 여유와 사치를 부렸다.
  집으로 들어오니 우리를 반기는 녀석이 있다. 우리 집에 온지 대여섯 달은 지난 것 같다. 큰딸이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서 급하게 서울로 가면서 마음이 타들어가는 듯 했고 결국은 한 해를 쉬기로 하고 집으로 오게 했다. 쉬면서 아무 하는 일없이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듯하여 교회오케스트라를 권했지만 큰딸은 교회를 옮겨오면서 이곳에서 크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지 안하겠다고. 그러면서 어느 날부터 고양이를 키우겠다고 졸랐다. 동물을 길러본 적이 없는 아내는 학을 뗐다. 서로 절충점을 찾기로 하는데 오케스트라를 하면 고양이를 키우게 하겠다고 했더니, 오케스트라를 절대 안한다고 했는데 의외로 오케스트라를 하겠다고 해서 갑자기 고양이가 들어오게 되었다. 첫날 진해에서 어린 고양이를 데리고 온 날, 퇴근하며 들어오는 아내의 질겁하는 모습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던 아내가 지금은 고양이를 아기 안듯이 얼굴을 갖다 댄다.
  고양이의 이름은 여럿이다. 딸들은 ‘먼지’, 아내는 아내대로 ‘뭉치’라고 부르고 나는 ‘놀부’라고 부른다. 페르시안 고양이의 수염이 놀부의 심술을 떠올려서 붙였다. 그런데 이 놀부는 자기 이름을 모른다. 거의 바보 수준이다. 그러나 주인을 신뢰하고 따르는 데는 감동적이다. 놀부는 아침에 알람이 울리면 문 앞에 와서 봐달라고 안아달라고 간절한 소리를 낸다. 다른 식구에게는 가지 않고 나를 찾는다. 아마도 자느라고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깨달았는지 모르겠다. 낮에 혼자 있다가 들어오면 문 열리는 소리에 얼마나 반갑게 달려오는지 모른다. 민감한 녀석임에도 안고 있으면 눈을 감고 자기를 온전히 주인에게 맡긴다. 발코니에서 자전거를 손보고 있으면 떠나지 않고 옆에서 논다. 지난 여름방학에는 때때로 온종일 자전거를 타고 집에 들어오면 온몸이 땀으로 절어있었다. 그 때도 놀부는 발을 핥으면서 주인에게 야양을 떤다. 어떤 근심도 없다. 하지만 우리 집에 선악과가 있다. 바로 식탁. 절대 출입금지 구역인 식탁에 오르면 오직 나만 두려워한다. 요즘은 눈치를 살핀다. 무기를 들면 슬슬 피한다. 때로는 그냥 엎드린다. 주인이 자기를 절대 죽이지 않을 것이고 다면 혼낼 뿐이라는 것을 안다. 다른 식구들은 달래서 안고 내리지만 나는 무기를 휘둘러서 쫓아 내리거나 밀어버린다. 그럼에도 나를 제일 좋아한다. 수차례 맞았지만 그래도 안기면 어떤 두려움도 없다.
  오늘은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서면서 놀부를 안으며 ‘내게 과연 고양이만한 믿음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좋지 않아 휴학한 1딸이 공대를 접고 음대로 가고 싶은 생각에 진로문제로 몇 달을 시름하는 모습으로 아비의 마음도 덩달아 안절부절, 재수생 2딸을 아침마다 학원에 태워주면서 아비의 마음은 항상 무겁고 불안했다. 1딸이 건강이 회복되고 다시 공대로 돌아가겠다는 최종 결정에 마음이 놓였고, 며칠 전 수능장을 담담하게 나오는 2딸을 보면서 또 한시름 접었다. 그럼에도 아직 사람이 덜된 듯한 막내가 집에 오니 여전히 귀엽지만 앞날이 무겁게 느껴진다. 이러한 아래로의 근심과 1년을 넘게 누워 계신 장모의 미소가 한없이 안타깝고, 365일 열린 전화기에 ‘엄마’ 글자가 뜨면 항상 놀라면서 전화를 받는다.
  올 들어 항상 꿈이던 32인치 허리가 얼마 전부터 31인치로 줄어든 것을 보면서 내가 놀부만한 믿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밤이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아버지로 알고 섬기고 때로는 두려워하기도 한다. 물론 의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올 한해 내게는 두려움이 너무 많았다. 내가 죽는 것보다 내 자식들이 잘못되는 것이 더 두려웠다. 이것도 이기적인 것이고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서도 여전이 제대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주님, 미물에 불과한 놀부가 저를 신뢰하듯이 제가 온전히 주님의 품안에서 제가 놀부를 바라보는 시선보다 더한 애정과 정확하고 확실하게 주변뿐 아니라 미래까지 살피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