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惡하고 부자가 罪人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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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길수 댓글 0건 조회Hit 1,280회 작성일Date 21-03-16 00:19본문
<< 돈이 악하고 부자가 죄인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누가복음 18:25)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배필을 찾아 떠나는 종에게 들려보낸 패물과 선물을 보면 아브라함이 꽤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의 재산 또한 만만찮은 부자라 할 수 있다.
다윗, 솔로몬 모두 부자였다.
신약시대에 바울을 도와 교회를 세운 자주장사 루디아도 엄청난 부자였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부자가 많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못들어 갔을까?
어떤 크리스쳔이 처음에 가난했다가 사업이 번성하여 부자가 되었다면 그는 선(善)한 사람에서 악인(惡人)으로 바뀌는 것인가? 그 사람이 그 돈으로 많은 구제를 했다면 그 사람은 악인인가 선한 사람인가?
가난은 무조건 선(善)하고 부(富)는 악한 것이다. 부자는 악한자이고 가난한자는 의인(義人)이라고 하는 개념은 좌파적 논리이며 세계관이다. 부자가 잘 사는 것은 가난한 자를 착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그래서 항상 대기업을 불법재벌로 프레임을 씌우고 대기업재벌이 선량한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그들의 부를 축적해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부는 당연히 사회에 환원되어야 하고 온갖 규제와 도덕적 주홍글씨를 새겨 그들을 공격한다. 그런데 한국의 대기업 노동자들의 연봉이 상상외로 높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또 다른 착취의 계급에 올라있다는 것도 이젠 비밀이 더 이상 아니다.
이런 “ 반 기업 정서”를 이용해서 또 다른 이익집단이 생성되게 된다.
작은 기업이든 큰 기업이든 오늘날 종교개혁에서부터 출발한 프로테스탄트윤리에 근거한 자유경제체제가 가져다준 엄청난 사회발전과 개인의 부의 축적에 따른 전반적인 삶의 수준의 상승화에는 그들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도들은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소명(召命)으로 이해하고 자신이 그 소명을 다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했다. 이런 윤리에 근거해서 모든 개인은 자유로운 시장에서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를 이루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고 이런 기술에 힘입어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이 개발되어 소비자도 도움이 되고 생산자도 도움이 되어 전체적으로 부가 향상되어 새로운 중산층이란 계층이 생기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 나아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시간이 흐르면서 폐해가 많이 고쳐지고 오히려 대기업에서 일반개인인 할 수 없는 많은 사회구제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기부를 많이 하고 있다. 이 또한 발전과정에 있는 것이다.
돈과 부는 나쁜 것인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돈이 과연 나쁘기만 할까?
성경에서는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죄라고 말한다. 꼭 돈이 아니더라도 명예, 자식, 권력, 등 하나님보다 우선적인 가치를 두는 것을 악이며 그것을 위해 내달리는 것이 죄(罪)라고 했다. 오늘 누가복음서의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부자는 돈 많은 사람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개념 중에 성욕(性慾)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성욕이 모두 나쁜 것인가? 성욕이 없으면 거룩하고 선한 것인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고 결혼 했어도 부부간에 성욕이 생기지 않으면 선(善)하고 거룩한 삶인가?
그러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잘못된 것인가?
아닐 것이다. 이 성욕이란 것이 가정을 벗어난 곳에서 발동할 때에 그것이 나쁜 것이란 것이다.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종교개혁 이전이나 이후에도 부(富)를 악(惡)이나 죄(罪)로 보았던 대표적인 경우가 금욕주의 이다. 이런 사상은 지금도 종교계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과 성욕을 억제하면서 사는 것이 그 선한 가치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상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사상에 교묘하게 스며들어 와서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이니 ‘공공신학’이니 하는 것들인데 가만 들여다 보면 그런 류(類)들은 그 뿌리가 공산주의 사상 또는 그것에 기초한 좌파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내용들이 복음과 짬뽕이 되어 교회에 들어올 때 진정한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나 성적(性的)윤리관들이 파괴되어 부자를 악인으로 만들고 ,건전한 성욕(性慾)을 부정한 음욕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는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맞지 않는 다고 주장하는 자들까지 이제는 나오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에서나 다른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부자(富者)는 모두 죄인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자는 모두 경제적으로 약자만을 가르키지는 않는다. 그러면 구원(救援)받으려면 모두가 경제적으로 가난해지면 되는 것 아닌가? 그 나머지가 뭐가 필요한 것인가? 형편없이 가난한 나라는 모두 구원의 첨단에 서 있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즉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가 아닌 하나님 앞에 심령(영혼)이 가난한 자인 것이다. 그런데 유독 부자와 가난이야기만 나오면 부자가 나쁜 것처럼 이야기 하고 이 구절을 가지고 부자를 핍박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한국이고 특히 한국의 좌파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돈을 벌려고 그렇게 아둥바둥대며 왜 좌파기독교도들은 그렇게 부자가 되려고 법을 어겨대면서까지 노력을 할까? 한마디도 공산주의 좌파는 기독교의 본질을 모르기도 할뿐더러 그들의 자신의 논리도 지켜내지 못하는 거짓말쟁이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가난한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다는 말씀(고후8:9)은 예수님께서 경제적으로 가난해지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성공한다는 것도 가짜 복음(유식한 말로 번영신학 이라고 한다)인 것이다.
크리스천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부(富)의 개념을 잘 알 필요가 있다.
어느 신학자가 이야기하기를 ‘Love God, hate money’ 가 아니라 ‘Love God with our money’ 가 맞다고 이야기 했는데 옳은 이야기인 것 같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누가복음 18:25)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배필을 찾아 떠나는 종에게 들려보낸 패물과 선물을 보면 아브라함이 꽤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의 재산 또한 만만찮은 부자라 할 수 있다.
다윗, 솔로몬 모두 부자였다.
신약시대에 바울을 도와 교회를 세운 자주장사 루디아도 엄청난 부자였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부자가 많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못들어 갔을까?
어떤 크리스쳔이 처음에 가난했다가 사업이 번성하여 부자가 되었다면 그는 선(善)한 사람에서 악인(惡人)으로 바뀌는 것인가? 그 사람이 그 돈으로 많은 구제를 했다면 그 사람은 악인인가 선한 사람인가?
가난은 무조건 선(善)하고 부(富)는 악한 것이다. 부자는 악한자이고 가난한자는 의인(義人)이라고 하는 개념은 좌파적 논리이며 세계관이다. 부자가 잘 사는 것은 가난한 자를 착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그래서 항상 대기업을 불법재벌로 프레임을 씌우고 대기업재벌이 선량한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그들의 부를 축적해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부는 당연히 사회에 환원되어야 하고 온갖 규제와 도덕적 주홍글씨를 새겨 그들을 공격한다. 그런데 한국의 대기업 노동자들의 연봉이 상상외로 높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또 다른 착취의 계급에 올라있다는 것도 이젠 비밀이 더 이상 아니다.
이런 “ 반 기업 정서”를 이용해서 또 다른 이익집단이 생성되게 된다.
작은 기업이든 큰 기업이든 오늘날 종교개혁에서부터 출발한 프로테스탄트윤리에 근거한 자유경제체제가 가져다준 엄청난 사회발전과 개인의 부의 축적에 따른 전반적인 삶의 수준의 상승화에는 그들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도들은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소명(召命)으로 이해하고 자신이 그 소명을 다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했다. 이런 윤리에 근거해서 모든 개인은 자유로운 시장에서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를 이루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고 이런 기술에 힘입어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이 개발되어 소비자도 도움이 되고 생산자도 도움이 되어 전체적으로 부가 향상되어 새로운 중산층이란 계층이 생기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 나아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시간이 흐르면서 폐해가 많이 고쳐지고 오히려 대기업에서 일반개인인 할 수 없는 많은 사회구제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기부를 많이 하고 있다. 이 또한 발전과정에 있는 것이다.
돈과 부는 나쁜 것인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돈이 과연 나쁘기만 할까?
성경에서는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죄라고 말한다. 꼭 돈이 아니더라도 명예, 자식, 권력, 등 하나님보다 우선적인 가치를 두는 것을 악이며 그것을 위해 내달리는 것이 죄(罪)라고 했다. 오늘 누가복음서의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부자는 돈 많은 사람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개념 중에 성욕(性慾)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성욕이 모두 나쁜 것인가? 성욕이 없으면 거룩하고 선한 것인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고 결혼 했어도 부부간에 성욕이 생기지 않으면 선(善)하고 거룩한 삶인가?
그러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잘못된 것인가?
아닐 것이다. 이 성욕이란 것이 가정을 벗어난 곳에서 발동할 때에 그것이 나쁜 것이란 것이다.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종교개혁 이전이나 이후에도 부(富)를 악(惡)이나 죄(罪)로 보았던 대표적인 경우가 금욕주의 이다. 이런 사상은 지금도 종교계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과 성욕을 억제하면서 사는 것이 그 선한 가치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상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사상에 교묘하게 스며들어 와서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이니 ‘공공신학’이니 하는 것들인데 가만 들여다 보면 그런 류(類)들은 그 뿌리가 공산주의 사상 또는 그것에 기초한 좌파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내용들이 복음과 짬뽕이 되어 교회에 들어올 때 진정한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나 성적(性的)윤리관들이 파괴되어 부자를 악인으로 만들고 ,건전한 성욕(性慾)을 부정한 음욕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는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맞지 않는 다고 주장하는 자들까지 이제는 나오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에서나 다른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부자(富者)는 모두 죄인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자는 모두 경제적으로 약자만을 가르키지는 않는다. 그러면 구원(救援)받으려면 모두가 경제적으로 가난해지면 되는 것 아닌가? 그 나머지가 뭐가 필요한 것인가? 형편없이 가난한 나라는 모두 구원의 첨단에 서 있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즉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가 아닌 하나님 앞에 심령(영혼)이 가난한 자인 것이다. 그런데 유독 부자와 가난이야기만 나오면 부자가 나쁜 것처럼 이야기 하고 이 구절을 가지고 부자를 핍박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한국이고 특히 한국의 좌파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돈을 벌려고 그렇게 아둥바둥대며 왜 좌파기독교도들은 그렇게 부자가 되려고 법을 어겨대면서까지 노력을 할까? 한마디도 공산주의 좌파는 기독교의 본질을 모르기도 할뿐더러 그들의 자신의 논리도 지켜내지 못하는 거짓말쟁이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가난한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다는 말씀(고후8:9)은 예수님께서 경제적으로 가난해지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성공한다는 것도 가짜 복음(유식한 말로 번영신학 이라고 한다)인 것이다.
크리스천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부(富)의 개념을 잘 알 필요가 있다.
어느 신학자가 이야기하기를 ‘Love God, hate money’ 가 아니라 ‘Love God with our money’ 가 맞다고 이야기 했는데 옳은 이야기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