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금기어가 될 수 있는 잠언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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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길수 댓글 0건 조회Hit 1,217회 작성일Date 21-06-26 13:38본문
<채찍과 꾸지람이 사라져 버린 세상 >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언29:15)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올바른 채찍과 꾸지람은 교육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서당에서는 회초리가 인성교육의 방법이었다. 성경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서양문화도 성경 속의 이런 채찍과 꾸지람을 당연히 해 왔었다. 또한 열왕기와 역대기에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키루스)’는 헤브라이즘 바깥에서는 교육에 대한 탁월한 고전(古典)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플라톤의 동문인 크세노폰이 저술한 “키루스의 교육(키로파에디아, CYROPAEDIA)” 는 교육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리더십 교육의 중요한 저서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절제와 올바른 인성을 위해 꾸지람 또는 벌에 대한 엄격한 이야기가 나온다. 교육을 의미하는 파에디아(PAEDIA)란 단어에서 소아과를 의미하는 PEDATRICS가 나왔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채찍과 꾸지람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언론에서는 심심찮게 청소년이나 젊은이에게 교육 차원의 꾸지람을 하다가 노인들이 얻어맞거나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는 뉴스가 나온다. 채찍과 꾸지람은커녕 좋은 말로 타이르는 것조차도 하기가 겁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제 어른들은 아이들이나 젊은이의 옳지 못한 행위에 대해서 눈감고 외면해 버린다.
더 심각한 것은 최근 들어 가르침의 또 다른 큰 장(場)인 학교에서 조차도 채찍과 꾸지람이 사라져 버렸다. 교육적 차원에서의 체벌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 되었고, 이제는 교사가 학생에게 꾸지람을 하면 학생은 대든다. 심지어 훈육하는 교사를 폭행하는 일도 이제는 무덤덤해지리만큼 자주 뉴스에 나온다. 사회공동체의 건강한 일원으로 성장시키는 교육보다도 개인의 인격이 우선되는 교육을 하고, 공동체의 이익보다 개인의 권익과 자유를 우선시한 교육의 결과이다. 이것은 한편으론 학교 스스로가 그런 교권을 포기한 결과이다. 자율, 차별금지, 인권침해금지, 처음엔 이 말이 그저 좋은 단어처럼 들렸을 터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엇이 우선인지를 생각해야 했고 , 그것을 무너뜨리는 법들이 만들어 질 때 막았어야 했다, 그런데 교사들은 이렇게 까지 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냥 직업적 교사로서 특별한 사고나 탈 없이 정년까지 복지부동 살아가든지, 이제는 학생을 상태로 소송전을 벌여야만 교권이 지켜지는 시대가 되었다. 앞으로 가정에서 조차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최근 들어 끊임없기 발의되는 학생인권 및 자치권과 관례 된 법안들이 그런 시대를 예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배움의 위치에 있는 학생의 인권이 아무도 침법할 수 없는 천부인권처럼 가르치기 때문에 선생님이든 부모이든 길 가던 어른이든 학생들의 행태에 어떠한 간섭도 해서는 안 된다. 인권침해란 것이다. 심지어 학생들의 자유로운 성생활 및 임신출산의 자유도 보장해 달라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이고 보면 입이 저절도 닫혀진다.
앞으로 교회 내에서도 학생들에게 잠언 29장 18절은 절대로 꺼집어내어서는 안 될 금기어가 될 수도 있겠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언29:15)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올바른 채찍과 꾸지람은 교육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서당에서는 회초리가 인성교육의 방법이었다. 성경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서양문화도 성경 속의 이런 채찍과 꾸지람을 당연히 해 왔었다. 또한 열왕기와 역대기에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키루스)’는 헤브라이즘 바깥에서는 교육에 대한 탁월한 고전(古典)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플라톤의 동문인 크세노폰이 저술한 “키루스의 교육(키로파에디아, CYROPAEDIA)” 는 교육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리더십 교육의 중요한 저서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절제와 올바른 인성을 위해 꾸지람 또는 벌에 대한 엄격한 이야기가 나온다. 교육을 의미하는 파에디아(PAEDIA)란 단어에서 소아과를 의미하는 PEDATRICS가 나왔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채찍과 꾸지람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언론에서는 심심찮게 청소년이나 젊은이에게 교육 차원의 꾸지람을 하다가 노인들이 얻어맞거나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는 뉴스가 나온다. 채찍과 꾸지람은커녕 좋은 말로 타이르는 것조차도 하기가 겁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제 어른들은 아이들이나 젊은이의 옳지 못한 행위에 대해서 눈감고 외면해 버린다.
더 심각한 것은 최근 들어 가르침의 또 다른 큰 장(場)인 학교에서 조차도 채찍과 꾸지람이 사라져 버렸다. 교육적 차원에서의 체벌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 되었고, 이제는 교사가 학생에게 꾸지람을 하면 학생은 대든다. 심지어 훈육하는 교사를 폭행하는 일도 이제는 무덤덤해지리만큼 자주 뉴스에 나온다. 사회공동체의 건강한 일원으로 성장시키는 교육보다도 개인의 인격이 우선되는 교육을 하고, 공동체의 이익보다 개인의 권익과 자유를 우선시한 교육의 결과이다. 이것은 한편으론 학교 스스로가 그런 교권을 포기한 결과이다. 자율, 차별금지, 인권침해금지, 처음엔 이 말이 그저 좋은 단어처럼 들렸을 터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엇이 우선인지를 생각해야 했고 , 그것을 무너뜨리는 법들이 만들어 질 때 막았어야 했다, 그런데 교사들은 이렇게 까지 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냥 직업적 교사로서 특별한 사고나 탈 없이 정년까지 복지부동 살아가든지, 이제는 학생을 상태로 소송전을 벌여야만 교권이 지켜지는 시대가 되었다. 앞으로 가정에서 조차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최근 들어 끊임없기 발의되는 학생인권 및 자치권과 관례 된 법안들이 그런 시대를 예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배움의 위치에 있는 학생의 인권이 아무도 침법할 수 없는 천부인권처럼 가르치기 때문에 선생님이든 부모이든 길 가던 어른이든 학생들의 행태에 어떠한 간섭도 해서는 안 된다. 인권침해란 것이다. 심지어 학생들의 자유로운 성생활 및 임신출산의 자유도 보장해 달라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이고 보면 입이 저절도 닫혀진다.
앞으로 교회 내에서도 학생들에게 잠언 29장 18절은 절대로 꺼집어내어서는 안 될 금기어가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