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앤 하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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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길수 댓글 0건 조회Hit 1,302회 작성일Date 21-02-17 12:37본문
눅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15: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15: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15: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기억의 상실인가? 착각인가?>>
어느 시대나 기회주의자가 있어 일신(一身)의 영화를 누리는 자들이 있었다. 부러운 자들은 그들의 훌륭한 처세술 덕분이라고 하겠고, 어떤 자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먹고 사는 나쁜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런 기회주의자들은 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런 류의 사람이 세리(稅吏)였고 거의 죄인의 수준으로 대하였던 것 같다.
하나님을 “믿는다” 고 하는 바리새인 이나 서기관들은 당연히 그들을 죄인으로 생각했다. 그 근거가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아니면 그런 큰 죄인은 아닐것이라고 “착각” 함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고 있었고 십계명에 적힌 사랑의 뜻을 전혀 지키지 않은 큰 죄인이었음에도 그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출애굽사건으로 얻어진 구원의 감격을 잊었기에 그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할까?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의 감격을 맛 본 교인들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신의 죄인 되었을 때를 잊고 살아가게 된다. 결국은 교회 밖 세상을 죄인으로 분류하고 욕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정죄를 하고 “죄성”을 발견하려고 힘쓴다. 그 죄성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상대적” 죄성(사실은 도덕성에 가까운)이 가벼움을 나타내고 싶은 것은 것이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그 죄성에서의 차이는 없는데도 말이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내가 “세리” 와 “바리새인”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 잊고 살거나 착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세리”처럼 살고 싶고, 교회에선 “바리새인”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죄인’ 이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가 주인에 의해 찾은 바된 한 마리 양에 불과하다. 이것을 끊임없이 기억해야한다. 이것이 날마다 내마음 속에 새로워지지 않으면 낮아지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낮아진 마음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이다.
눅15: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15: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15: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기억의 상실인가? 착각인가?>>
어느 시대나 기회주의자가 있어 일신(一身)의 영화를 누리는 자들이 있었다. 부러운 자들은 그들의 훌륭한 처세술 덕분이라고 하겠고, 어떤 자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먹고 사는 나쁜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런 기회주의자들은 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런 류의 사람이 세리(稅吏)였고 거의 죄인의 수준으로 대하였던 것 같다.
하나님을 “믿는다” 고 하는 바리새인 이나 서기관들은 당연히 그들을 죄인으로 생각했다. 그 근거가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아니면 그런 큰 죄인은 아닐것이라고 “착각” 함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고 있었고 십계명에 적힌 사랑의 뜻을 전혀 지키지 않은 큰 죄인이었음에도 그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출애굽사건으로 얻어진 구원의 감격을 잊었기에 그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할까?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의 감격을 맛 본 교인들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신의 죄인 되었을 때를 잊고 살아가게 된다. 결국은 교회 밖 세상을 죄인으로 분류하고 욕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정죄를 하고 “죄성”을 발견하려고 힘쓴다. 그 죄성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상대적” 죄성(사실은 도덕성에 가까운)이 가벼움을 나타내고 싶은 것은 것이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그 죄성에서의 차이는 없는데도 말이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내가 “세리” 와 “바리새인”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 잊고 살거나 착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세리”처럼 살고 싶고, 교회에선 “바리새인”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죄인’ 이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가 주인에 의해 찾은 바된 한 마리 양에 불과하다. 이것을 끊임없이 기억해야한다. 이것이 날마다 내마음 속에 새로워지지 않으면 낮아지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낮아진 마음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