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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와 관객(하나님과 나와 자녀와의 관계에 적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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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종수 댓글 0건 조회Hit 2,287회 작성일Date 08-05-19 13:03

본문


"출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본문을 중심으로 배우와 관객이라는 주제로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나와 자녀와의 관계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관객이요 기록자요 간증자임을 깨우쳐 주셨다.
  출애굽 직전의 나와 내 자녀와의 관계는 세상(바로)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런 환경아래 있던 나와 내 자녀 관계에 하나님께서 주인공으로 등장하셨다. 그리고 내게(모세) 본문의 말씀대로 말씀하셨고(그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말씀대로 행하셨으며 지금도 행하시고 계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와 내 자녀의 출애굽사건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도하셨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배역이나 역할이 있었지만 그 연기는 나한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때그때의 대사도 행동도 결정도 모두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었음을 간증한다. 결국 사탄의 세력에게 열 가지 재앙으로 대표되는 강한 손을 더하셔서 나와 내 자녀들은 옛 집안에서 쫓겨난 셈이 되었다. 분명 무대는 나와 내 자녀들의 인생무대였지만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사탄과 그 세력들이 나와 우리 자녀들을 내어 보내게 했으며 우리는 관객이었음을 간증한다.

 나에게 자녀들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소중한 자녀들을 맡기셨는데 맡은 자로서 자녀를 제대로 양육해 왔는지, 나와 자녀의 관계는 제대로 된 것인지를 생각하면 항상 하나님 앞에 서기가 부끄럽다. 이제 자녀의 진로와 배우자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녀의 앞날을 주관하시도록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자녀를 통해 이루어 가실 비전이 기대가 된다. 자녀의 성장과 함께 한 세월동안 나와 자녀 관계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왔고 또한 나자신도 달라져 왔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과정에서  이 관계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데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자녀들을 힘들게 해왔음을 고백한다. 나는 이관계를 내가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다가  자녀들의 저항에 직면하게되자 저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책임하에 전적으로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나와 자녀간의 관계에 대한 주도권에 대해 단계별로 달라져온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다.

  아버지와 자녀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것일까? 성숙한 자녀라면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줄 알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을 자원해서 행하고 아버지의 명예에 해가 되는 일은 삼갈 것이다. 또한 아버지에게 아침에 오늘 할 일을 의논하고 저녁에는 행한 일을 여쭙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또한 부자간에는 어떠한 감정도 나누고 희로애락을 함께 할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땅에 계시는 동안 본이되시는 관계를 실제로 보여 주셨다. 이 관계는 하나님과 나, 그리고 나와 자녀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원 받기 전 나와 내 자녀와의 관계는 내가 주도하는 것이었다. 나와 내 자녀와의 관계에서 나는 자녀들에게 세상은 우리 힘으로 우리 책임으로 살아야 하며 우리 인생 최고의 가치는 자아를 실현하는 것 곧 세상적인 성공이라고 가르쳤다. 이를 위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해도 좋다고 했다. 
  출애굽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애굽을 떠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하던지 그곳에서 성공하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광야나 고난의 길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을 받은 후 처음에는 우리 인생의 목적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우리가 주인공 되어 우리 인생의 무대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격려해 주시며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 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얼마나 받건, 아니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판단할 문제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우리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동기부여나 방향 제시는 전적으로 내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자녀의 입장이나 우리의 관계에는 전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으로 인해 우리 관계나 자녀에게 의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방해받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 피해는 자녀에게 돌아가게 되고 우리 관계가 어려워지는 결과를 초래했을 수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나안으로 가라하셨다고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나는 광야 길을 택하지 않고 쉬운 길로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며 가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훈련을 피하려 했을 것이다.

  다음 단계로 나는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관계를 주관하고 계심을 조금씩 깨달아 가게 되었고 혹 하나님은 우리 관계의 감독자요 연출자이시고 우리는 단순히 주어진 연기만 하는 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 관계는 순전히 그분의 각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경우 우리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 관계는 하나님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한가? 우리는 우리 관계에 책임이 없는가? 하며 갈등하기도 했다.
  이 단계에서 자녀와의 관계는 역시 주어진 배역에 맞추어 연기만 하는 것으로 관계가 좋건 나쁘건 그건 전적으로 대본 탓이라고 그래서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대본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제대로 순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온 생각이어서 언행일치가 안 되었고 이로 인해 자녀의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출애굽 사건과 관련시켜 본다면 광야훈련에 지친 나머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면서 불만에 차 있을 우리의 모습이 연상되어진다.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은 우리 관계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목적에 맞게 설계하셨으며 그에 합당한 사용설명서를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간이다. 설계도나 설명서를 내가 알지 못할 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목적에 따라 우리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 관계에서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행해야 할 행동, 대사 및 연기에 대해 이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그때 성령님께서 인도하실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관계는 목적에 맞추어 의무적으로 살아야 하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남아 있어 여전히 허전한 느낌이 들고 왜 그래야 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보면 우리 관계에 합당한 설계도와 설명서를 보여 주시라고 구했던 기간이다. 특별히 자녀교육 세미나와 가정사역 그리고 아버지학교에 참여하기 시작했던 기간이다. 의도하신대로 산다는 것은 자연 질서 가운데 하나의 피조물로서, 더 나아가 구원을 받은 보상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할을 의무적으로 하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흘러야 할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 했던 기간이다. 더구나 우리관계에서도 자녀의 반항에 직면하여 마지못해 관계 정상화를 위해 지혜를 구했던 기간이다. 그리고 지혜를 주신다면 전적으로 내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그 목적은 궁극적으로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출애굽 사건과 관련시켜 본다면 나는 가나안으로 가도록 예정되어 졌음도 알고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도 알지만 가는 과정이 힘들고 어려울 경우 왜 꼭 가야 하는가? 굳이 가야한다 하더라도 기쁨으로 가지 못하고 의무감으로 가야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다음으로는 이 생각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면서 많이 달라지는 기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가도록 요구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과 상관없이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애굽에 계속 살 수 있으시겠는가? 또 하나님은 동기를 부여할 뿐이요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몫이라고 어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사시다가 자포자기하실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본질은 같으시되 각 각의 인격체가 아니신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서 나와 하나님 간의 관계 그리고 나와 자녀의 관계를 점검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나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와의 교제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계로 발전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나야 피조물이고 양자된 신분이 아닌가? 그것도 영적인 유아상태로 입양되었고 자라가면서 예수님을 닮도록 계획되어진 관계가 아닌가? 궁극적으로는 사복음서에서 기술된 예수님처럼 살수 있기까지 성장하길 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그렇게 산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쓰고 있는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야 하는 과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방법을 제시하신다. 예수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삶을 주도하도록 내어드리면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이를 위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지 아니 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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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관계를 주도하시고 우리는 관객이요 기록자요 간증자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의 삶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주도하심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관계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조금은 개선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먼저 나와 자녀가 같이 육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육신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관계의 주인공자리를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면 우리 관계가 바람직한 관계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가지신 이 땅에서의 관계가 우리 관계를 통해 조금씩 재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하나님 그리고 자녀 관계에서 나를 돌아보면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럽다. 아직도 자라기를 거부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눈 밖에서 계속해서 맴돌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예수님께 맡겨야 할 것을 아직도 내가 해보겠다고 우기기만 하고 결국 되지도 않아서 고생만 죽도록 하는 일이 비일 비재하다.
  이 관계의 성장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리고 제대로 할 수는 있는 것인가?
우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야겠다. 본이 되시는 예수님께 더 배워야 하고 솔직히 내 힘으로는 안 된다고 고백하자. 또 매일 아침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겠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예를 소중히 하자. 내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나를 자녀 삼으셨듯이 내 자녀도 자녀 삼으시지 않으셨는가? 우리관계를 주도하시도록 관계 그 자체를 올려드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듯이 자녀를 신뢰하기로 하자. 모두다 올려드리자. 내 쪽에서 노력하던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인정하자. 출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 출발은 하나님의 주도하심이다.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