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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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창수 댓글 1건 조회Hit 2,466회 작성일Date 08-08-04 18:29본문
1955년 초등학교 1학년 때 쯤 이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6. 25 전쟁이 끝 난지 오래지 않아서 인지 빨찌산 소탕을 위해 무장한 국군들이 가끔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들을 두려움 반 호기심 반 훔쳐보던 그 시절 어느 날 내가 살던 시골 마을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키가 땅딸막하며 합바지 바지저고리를 입고 성경 이야기를 침을 튀겨가며 온몸으로 열심히 재미있게 들려주시던 집사 선생님이 좋아서 이웃 또래 동무들과 함께 부지런히 다녔던 우리 마을에 하나 뿐인 자그마한 교회에 낯선 손님이 한분 오셨기 때문이다.
예배를 마치고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집에 가지 말고 구호물자(?)를 가지고 오시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자고 하시면서 교회 구석구석 청소를 시키셨다. 마당을 비로 쓸고 손걸레를 빨아 예배당 바닥을 엉덩이를 치켜들고 밀고 달리며 넘어지기도 하고 뭔가를 기대하는 설레임 속에 즐거운 기다림이 있던 중 지프차 한대가 도착 하였고 차에서 내린 손님은 당시 일반적인 호칭으로 코쟁이라 불렸던 코가 크고 키가 크고 눈이 파란 서양인 이었는데 아마도 선교사 신분이 아니었나 싶다.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시고 파란 눈의 코쟁이 손님은 말없이 빙긋이 웃으며 차에 싣고 온 선물 보따리를 허리를 굽혀가며 하나씩 나눠 주었다. 아이들은 서둘러 각자 받은 선물 보따리를 풀고 그 속에 있는 물품들을 살펴보며 서로 비교해 보기도하고 횡재한 기분에 들떠 즐거워하였다. 내용물은 셔츠종류 1매, 연필, 지우개, 옷핀, 머리핀, 손톱깎이, 껌, 바늘쌈, 스푼, 칫솔, 비누, 양말, 맥가이버칼, 소형 장난감등 당시로서는 생활필수품으로아주 요긴한 것들이 보따리마다 동일하게는 아니더라도 골고루 조금씩 넣어 타올로 말아싸고 옷핀으로 고정시킨 작은 보따리 이었다.
흥분한 아이들은 각자 집으로 달려가 어무이 아부지 에게 보따리를 자랑스레 전해 드렸고“뭐꼬? 예배당에서 주더라꼬?!” 하시며 이것저것 살펴보시고 귀한 타올은 물론이고 타올을고정 시키기 위해 꽂은 옷핀까지도 하나하나 챙기시며 반색 하시는 부모님 앞에 뭔가 어깨가 으쓱 해졌던 기억이 난다.
약간의 불협화음도 있었다. “우리애도 이전에 예배당에 다녔는데 하나 줄 수 없느냐”
“우리도 하나주면 아이를 예배당에 보내겠다” 는둥 동네 어른들의 욕심 섞인 주책에 두루마기 차림의 연세 지긋하신 전도사님께서 꽤나 난처해 하셨던 것 같았다. 아마도 준비해온 보따리가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3년여 간의 전쟁 후 어려웠던 시절이라 물자가 부족하고 찢어지는 가난과 배고픔에 힘들어 했던 이웃에게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심부름꾼이 되어주었던 파란 눈의 그분, 그분이 전해준 고만고만한 작은 그것들이 교회를 통해 전해진 곳 마다 기쁨과 희망이 심겨졌으리라.
풍요했던 그분들의 생활수준에는 별것 아니었을 지라도 아무것도 없다 시피한 우리들에겐 너무나 요긴했던 작은 보따리 하나!!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에도 선명한 기억으로 나의 가슴에 남아있는 파란 눈의 그미소!!
우리에겐 별 생각 없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그것들이 너무나 소중히 여겨지는 우리 이웃들은 없을까? 그리고 그때 그 파란 눈의 따뜻한 미소가 전해져야할 우리 이웃들은 없을까?
각처로 단기 선교를 떠나는 지체들을 파송하며 천국을 겨자씨에 비교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그때 그 파란 눈의 이방인 선교사들에 의해 각처에 뿌려진 겨자씨가 자라 지금쯤 얼마나 많은 새들이 깃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복음에 빚진 우리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타올 보따리 겨자씨를 한마음으로 정성스레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며 그때를 위해 기도해본다.
6. 25 전쟁이 끝 난지 오래지 않아서 인지 빨찌산 소탕을 위해 무장한 국군들이 가끔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들을 두려움 반 호기심 반 훔쳐보던 그 시절 어느 날 내가 살던 시골 마을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키가 땅딸막하며 합바지 바지저고리를 입고 성경 이야기를 침을 튀겨가며 온몸으로 열심히 재미있게 들려주시던 집사 선생님이 좋아서 이웃 또래 동무들과 함께 부지런히 다녔던 우리 마을에 하나 뿐인 자그마한 교회에 낯선 손님이 한분 오셨기 때문이다.
예배를 마치고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집에 가지 말고 구호물자(?)를 가지고 오시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자고 하시면서 교회 구석구석 청소를 시키셨다. 마당을 비로 쓸고 손걸레를 빨아 예배당 바닥을 엉덩이를 치켜들고 밀고 달리며 넘어지기도 하고 뭔가를 기대하는 설레임 속에 즐거운 기다림이 있던 중 지프차 한대가 도착 하였고 차에서 내린 손님은 당시 일반적인 호칭으로 코쟁이라 불렸던 코가 크고 키가 크고 눈이 파란 서양인 이었는데 아마도 선교사 신분이 아니었나 싶다.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시고 파란 눈의 코쟁이 손님은 말없이 빙긋이 웃으며 차에 싣고 온 선물 보따리를 허리를 굽혀가며 하나씩 나눠 주었다. 아이들은 서둘러 각자 받은 선물 보따리를 풀고 그 속에 있는 물품들을 살펴보며 서로 비교해 보기도하고 횡재한 기분에 들떠 즐거워하였다. 내용물은 셔츠종류 1매, 연필, 지우개, 옷핀, 머리핀, 손톱깎이, 껌, 바늘쌈, 스푼, 칫솔, 비누, 양말, 맥가이버칼, 소형 장난감등 당시로서는 생활필수품으로아주 요긴한 것들이 보따리마다 동일하게는 아니더라도 골고루 조금씩 넣어 타올로 말아싸고 옷핀으로 고정시킨 작은 보따리 이었다.
흥분한 아이들은 각자 집으로 달려가 어무이 아부지 에게 보따리를 자랑스레 전해 드렸고“뭐꼬? 예배당에서 주더라꼬?!” 하시며 이것저것 살펴보시고 귀한 타올은 물론이고 타올을고정 시키기 위해 꽂은 옷핀까지도 하나하나 챙기시며 반색 하시는 부모님 앞에 뭔가 어깨가 으쓱 해졌던 기억이 난다.
약간의 불협화음도 있었다. “우리애도 이전에 예배당에 다녔는데 하나 줄 수 없느냐”
“우리도 하나주면 아이를 예배당에 보내겠다” 는둥 동네 어른들의 욕심 섞인 주책에 두루마기 차림의 연세 지긋하신 전도사님께서 꽤나 난처해 하셨던 것 같았다. 아마도 준비해온 보따리가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3년여 간의 전쟁 후 어려웠던 시절이라 물자가 부족하고 찢어지는 가난과 배고픔에 힘들어 했던 이웃에게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심부름꾼이 되어주었던 파란 눈의 그분, 그분이 전해준 고만고만한 작은 그것들이 교회를 통해 전해진 곳 마다 기쁨과 희망이 심겨졌으리라.
풍요했던 그분들의 생활수준에는 별것 아니었을 지라도 아무것도 없다 시피한 우리들에겐 너무나 요긴했던 작은 보따리 하나!!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에도 선명한 기억으로 나의 가슴에 남아있는 파란 눈의 그미소!!
우리에겐 별 생각 없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그것들이 너무나 소중히 여겨지는 우리 이웃들은 없을까? 그리고 그때 그 파란 눈의 따뜻한 미소가 전해져야할 우리 이웃들은 없을까?
각처로 단기 선교를 떠나는 지체들을 파송하며 천국을 겨자씨에 비교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그때 그 파란 눈의 이방인 선교사들에 의해 각처에 뿌려진 겨자씨가 자라 지금쯤 얼마나 많은 새들이 깃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복음에 빚진 우리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타올 보따리 겨자씨를 한마음으로 정성스레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며 그때를 위해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