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에 대하여 재정립하게 제시한 글을 보고 함께 공유하길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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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명호 댓글 0건 조회Hit 2,792회 작성일Date 09-03-05 10:18본문
최근 선교정의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전도는 동일 문화권 내 복음사역을 의미하며 선교는 타문화권 복음사역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대회에서 루푸스 존스에 의해 선교의 의미전환이 시도되었다. 선교는 교회의 모든 사역을 의미하는 포괄적인 것으로 확대되었으며, 전도는 복음을 증거하는 좁은 의미의 사역으로 의미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의미 전환은 이후에 영국 신학자 존 스토트에 의해서도 수용되었다. 이리하여 전도는 유앙겔리온, 즉 기쁜 소식을 전하는 행위, 복음의 메시지가 강조되는 좁은 의미로, 선교는 Missio Dei, 즉 하나님의 선교로 대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선교의 정의는 전략적 필요가 증대됨에 따라 산업화 복합사회에 대응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점차 확대 해석되었다. 이 결과로 포괄적인 의미의 선교활동은 활성화되는 반면, 전도의 중요성은 갈수록 퇴색되었다. 또한 타문화권에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전통적 ‘선교’는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어 갔고 타문화권 선교활동 역시 갈수록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의 복음주의 선교지도자 랄프 윈터는 전도evangelism의 정의를 다음 세가지 단계로 설정하면서 교회의 타문화권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첫 번째 회심과 영적 각성, 두 번째 복음증거와 교회성장, 세 번째 타문화권 선교로 재정의 하였다. 전도나 선교는 복음전파와 제자양육을 통한 교회개척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주님의 선교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첫째,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모든 족속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후에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어 모든 족속의 언어와 방언으로 말하심으로 모든 족속을 향한 전도, 즉 언어와 문화가 상이한 타문화권 선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다. 이렇게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모든 족속에 복음이 증거될 때 주님이 재림하시며 역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선교명령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민족이 100% 복음화가 된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민족에 복음이 증거될 때 완성된다(마24:14). 또한 하나님은 한 민족의 100% 복음화를 약속하신 적도 없으며 역사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화율이 높아지면 민족 교회는 문명화되면서 쇠퇴해 갔다. 그리고 형식적이고 명목적인 문화적 크리스천만 우글거리는, 소위 살았다고 하나 사실은 죽은 교회로 전락해 갔다. 하나님은 복음을 받지 않은 모든 민족들이 다 복음을 듣기 원하신다. 이것이 지난 2천 년의 교회의 역사이며 인류역사의 기조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이 지상명령을 중심축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역사의 전진이며 선교사missionary는 하나님의 역사의 주역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선교사를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history makers”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봉사를 통해 이루어 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하신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4;17)였다. 회개가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는다. 회개는 죄를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목숨을 던지는 사회봉사를 할지라도 죄에 대한 회개와 회심이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포괄적 정의의 선교의 한계가 있다. 복음증거가 배제된 사회봉사나 사회참여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마치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 구분되듯이 포괄적 의미의 선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한결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선교의 핵심은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에 있다. 복음증거가 배제된 선교활동은 성경적 의미에서의 선교가 아니다. 필자는 봉사를 선교로 대체하려는 집요한 시도를 강력히 거부한다. 봉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교 없는 봉사는 결코 선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면은 성경적 선교의 정의에서도 잘 나타난다. 선교mission라는 용어는 요한복음 20:21 “보낸다”의 어원 ‘아포스텔로’와 마태복음 28:19 “가라!”의 어원 ‘펨포’의 뜻이 조합되어 파생된 단어이다. 로마교회는 수도원을 통해 타문화권에 수도사(선교사)를 파송할 때에 사도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아포스텔로”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도적 교회에서 파송 받는 자라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바울사도는 롬1:5에서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한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라는 단어와 이방인 선교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이방인 사역을 하기 때문에 사도적 권위를 가진 자라는 우회적인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선교는 사도적 사역이다. 선교의 정의를 논할 때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사역을 벗어나서 이야기 할 수 없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복음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자신이 이방인들의 선교사임을 밝히고 있다. 바울사도는 결코 사회참여와 봉사를 복음사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의 선교사역은 복음증거와 교회개척에 집중되었다. 선교사는 교회의 파송을 받아 타문화권에 복음을 증거하며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자이다. 예수께서 3년 동안 12제자를 양육하셨던 것처럼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전도하여 제자들을 양육하고 교회를 개척한다. 그리스도인의 모임, 즉 교회공동체를 개척하지 않는 선교사는 정상적인 선교사가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말씀하셨다. 반석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신앙고백이다.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교회는 이루어져 간다. 우리는 여기서 선교전략의 핵심가치를 보게 된다. 주님은 모든 민족으로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셨다. 한 민족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교회가 음부의 권세를 이긴다. 교회를 세워야 그 민족의 변혁이 가능하다. 사회봉사를 통해서 결코 본질적인 변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빵이 필요하다. 그러나 결코 빵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어 많은 사역을 하셨으나 그 사역의 핵심은 12명의 제자를 양성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계 변혁의 지상명령을 주셨다. 변혁transformation을 말하면서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 땅에서 교회 없는 하나님의 나라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삶과 목숨을 던져 교회개척에 헌신하는 것이다.
요즈음 사회봉사를 선교 영역에 넣으려는 조직적인 작업이 우리 주변에서 추진되고 있다. 교회개척을 위해 파송된 수많은 선교사가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은 하지 않고 구제와 사회봉사 활동만 하는 NGO요원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요즈음 NGO요원으로 파견되어 사회봉사만 하면서 선교의 탈을 쓰고 “나도 선교사입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지역교회의 재정적 후원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업적을 감동적으로 각색하고 또한 과도하게 포장하기도 한다.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에 헌신한 선교단체보다 사회봉사 하는 NGO봉사 단체가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로부터 훨씬 더 많은 후원금을 모집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교회개척 하는 선교사와 사회봉사 하는 NGO요원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타문화권에서 전도와 제자양육을 통한 교회개척, 즉 선교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전략적 차원에서 사회봉사나 NGO사역을 병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제 및 사회봉사나 NGO사역은 복음증거와 교회개척의 좋은 도구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다.
1974년 로잔대회와 1975년 WCC 나이로비 총회에서 구원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선교에 대한 통전적 접근이 천명되었다. 모든 교회가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을 온 세상the whole world 모든 사람the whole people에게 전하는 통전적 선교Holistic Mission는 전도, 치유, 인간화, 해방, 사회변혁을 포함하는 것이다.
1975년에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 대신에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을 주창하였다. 교회는 복음전도와 사회봉사를 통한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의 이행, 두 영역을 서로 분리하여 이분법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총체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온전한 복음”은 선교명령과 문화명령이 동시에 수행될 때 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총체적 선교, 즉 통전적 선교는 다원화되고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구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상황성에 대한 새로운 대응전략으로써 통전적 선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본질을 크게 벗어나는 경향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로잔대회에서 <온전한 복음>이 강조된 이후 세계교회는 질적으로 또 양적으로 성장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1975년 이후 이슬람종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복음주의 개신교 교회의 성장은 상대적으로 매우 미미하다. 온전한 복음을 통한 새로운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세계교회는 급속히 세속화되어 갔고 영적 리더십을 상실했으며, 그 역작용으로 유시 종교 이슬람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교회의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1960-70년대 전통적 복음전파에 집중하던 한국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문화명령과 사회적 책임을 기조로 하는 ‘온전한 복음’으로의 전환은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을 가속화 시켜왔다. 미국교회의 사례도 마찬가지이다. 서유럽 교회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러하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교회는 문화명령을 강조하더니 교회의 사회참여는 증대하였으나 교회는 죽어 갔다. 교회 성장과 성숙을 목적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했는데 그 결과는 참담하다. 루푸스 존스와 존 스토트는 실패한 것이다.
바울사도가 강력히 천명한 것처럼 복음이 능력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1:16-17). 소위 “온전한 복음”은 하나의 전략적 접근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결코 본질이 될 수는 없다. 요즈음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인격적이고 고급 선교인 양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문화명령이 선교명령과 동급으로 취급될 수는 없다. 문화명령은 선교명령의 종속 개념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마28:18-20에 천명된 선교명령이 지상명령이라는 사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 명령은 예수께서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주신 명령이다. 피로 하신 명령이다. 주께서 피로하신 명령은 어떠한 박해나 위험에도 포기되거나 결코 타협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복하고 다스려라!’(창1:26-28)는 문화명령을 주신 것은 인간 타락 이전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 인류 문제의 핵심은 타락이요 죄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어떤 봉사나 사회참여도 본질적이거나 궁극적일 수 없다. 타락한 인간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선교명령을 주셨다. 선교명령이 수행되지 않는 문화명령은 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한다.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만이 유일한 소망이요 구원이시다. 예수 없는 사랑은 모든 종교에 내재되어 있다. 예수 없는 사랑은 결국 다원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문화명령은 거룩한 도구로 이해해야 하며 통전적 선교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 문화명령이 없는 선교명령은 홀로 역사한다. 그러나 선교명령이 없는 문화명령은 홀로 역사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예수 없는 사랑이 온전한 구원,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화명령은 선교명령에 종속되어야 한다. 가장 온전한 선교 접근은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을 위해 문화명령을 전인적 도구로 삼아 선교명령을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온전한 복음>이 아니라 <영원한 복음>에 집착해야 한다. 결국 영원한 복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성을 회복케 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할 것이다(계14:
그러나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의 복음주의 선교지도자 랄프 윈터는 전도evangelism의 정의를 다음 세가지 단계로 설정하면서 교회의 타문화권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첫 번째 회심과 영적 각성, 두 번째 복음증거와 교회성장, 세 번째 타문화권 선교로 재정의 하였다. 전도나 선교는 복음전파와 제자양육을 통한 교회개척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주님의 선교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첫째,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모든 족속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후에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어 모든 족속의 언어와 방언으로 말하심으로 모든 족속을 향한 전도, 즉 언어와 문화가 상이한 타문화권 선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다. 이렇게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모든 족속에 복음이 증거될 때 주님이 재림하시며 역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선교명령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민족이 100% 복음화가 된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민족에 복음이 증거될 때 완성된다(마24:14). 또한 하나님은 한 민족의 100% 복음화를 약속하신 적도 없으며 역사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화율이 높아지면 민족 교회는 문명화되면서 쇠퇴해 갔다. 그리고 형식적이고 명목적인 문화적 크리스천만 우글거리는, 소위 살았다고 하나 사실은 죽은 교회로 전락해 갔다. 하나님은 복음을 받지 않은 모든 민족들이 다 복음을 듣기 원하신다. 이것이 지난 2천 년의 교회의 역사이며 인류역사의 기조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이 지상명령을 중심축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역사의 전진이며 선교사missionary는 하나님의 역사의 주역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선교사를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history makers”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봉사를 통해 이루어 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하신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4;17)였다. 회개가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는다. 회개는 죄를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목숨을 던지는 사회봉사를 할지라도 죄에 대한 회개와 회심이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포괄적 정의의 선교의 한계가 있다. 복음증거가 배제된 사회봉사나 사회참여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마치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 구분되듯이 포괄적 의미의 선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한결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선교의 핵심은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에 있다. 복음증거가 배제된 선교활동은 성경적 의미에서의 선교가 아니다. 필자는 봉사를 선교로 대체하려는 집요한 시도를 강력히 거부한다. 봉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교 없는 봉사는 결코 선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면은 성경적 선교의 정의에서도 잘 나타난다. 선교mission라는 용어는 요한복음 20:21 “보낸다”의 어원 ‘아포스텔로’와 마태복음 28:19 “가라!”의 어원 ‘펨포’의 뜻이 조합되어 파생된 단어이다. 로마교회는 수도원을 통해 타문화권에 수도사(선교사)를 파송할 때에 사도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아포스텔로”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도적 교회에서 파송 받는 자라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바울사도는 롬1:5에서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한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라는 단어와 이방인 선교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이방인 사역을 하기 때문에 사도적 권위를 가진 자라는 우회적인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선교는 사도적 사역이다. 선교의 정의를 논할 때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사역을 벗어나서 이야기 할 수 없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복음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자신이 이방인들의 선교사임을 밝히고 있다. 바울사도는 결코 사회참여와 봉사를 복음사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의 선교사역은 복음증거와 교회개척에 집중되었다. 선교사는 교회의 파송을 받아 타문화권에 복음을 증거하며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자이다. 예수께서 3년 동안 12제자를 양육하셨던 것처럼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전도하여 제자들을 양육하고 교회를 개척한다. 그리스도인의 모임, 즉 교회공동체를 개척하지 않는 선교사는 정상적인 선교사가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말씀하셨다. 반석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신앙고백이다.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교회는 이루어져 간다. 우리는 여기서 선교전략의 핵심가치를 보게 된다. 주님은 모든 민족으로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셨다. 한 민족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교회가 음부의 권세를 이긴다. 교회를 세워야 그 민족의 변혁이 가능하다. 사회봉사를 통해서 결코 본질적인 변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빵이 필요하다. 그러나 결코 빵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어 많은 사역을 하셨으나 그 사역의 핵심은 12명의 제자를 양성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계 변혁의 지상명령을 주셨다. 변혁transformation을 말하면서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 땅에서 교회 없는 하나님의 나라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삶과 목숨을 던져 교회개척에 헌신하는 것이다.
요즈음 사회봉사를 선교 영역에 넣으려는 조직적인 작업이 우리 주변에서 추진되고 있다. 교회개척을 위해 파송된 수많은 선교사가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은 하지 않고 구제와 사회봉사 활동만 하는 NGO요원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요즈음 NGO요원으로 파견되어 사회봉사만 하면서 선교의 탈을 쓰고 “나도 선교사입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지역교회의 재정적 후원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업적을 감동적으로 각색하고 또한 과도하게 포장하기도 한다.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에 헌신한 선교단체보다 사회봉사 하는 NGO봉사 단체가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로부터 훨씬 더 많은 후원금을 모집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교회개척 하는 선교사와 사회봉사 하는 NGO요원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타문화권에서 전도와 제자양육을 통한 교회개척, 즉 선교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전략적 차원에서 사회봉사나 NGO사역을 병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제 및 사회봉사나 NGO사역은 복음증거와 교회개척의 좋은 도구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다.
1974년 로잔대회와 1975년 WCC 나이로비 총회에서 구원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선교에 대한 통전적 접근이 천명되었다. 모든 교회가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을 온 세상the whole world 모든 사람the whole people에게 전하는 통전적 선교Holistic Mission는 전도, 치유, 인간화, 해방, 사회변혁을 포함하는 것이다.
1975년에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 대신에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을 주창하였다. 교회는 복음전도와 사회봉사를 통한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의 이행, 두 영역을 서로 분리하여 이분법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총체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온전한 복음”은 선교명령과 문화명령이 동시에 수행될 때 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총체적 선교, 즉 통전적 선교는 다원화되고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구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상황성에 대한 새로운 대응전략으로써 통전적 선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본질을 크게 벗어나는 경향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로잔대회에서 <온전한 복음>이 강조된 이후 세계교회는 질적으로 또 양적으로 성장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1975년 이후 이슬람종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복음주의 개신교 교회의 성장은 상대적으로 매우 미미하다. 온전한 복음을 통한 새로운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세계교회는 급속히 세속화되어 갔고 영적 리더십을 상실했으며, 그 역작용으로 유시 종교 이슬람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교회의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1960-70년대 전통적 복음전파에 집중하던 한국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문화명령과 사회적 책임을 기조로 하는 ‘온전한 복음’으로의 전환은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을 가속화 시켜왔다. 미국교회의 사례도 마찬가지이다. 서유럽 교회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러하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교회는 문화명령을 강조하더니 교회의 사회참여는 증대하였으나 교회는 죽어 갔다. 교회 성장과 성숙을 목적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했는데 그 결과는 참담하다. 루푸스 존스와 존 스토트는 실패한 것이다.
바울사도가 강력히 천명한 것처럼 복음이 능력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1:16-17). 소위 “온전한 복음”은 하나의 전략적 접근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결코 본질이 될 수는 없다. 요즈음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인격적이고 고급 선교인 양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문화명령이 선교명령과 동급으로 취급될 수는 없다. 문화명령은 선교명령의 종속 개념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마28:18-20에 천명된 선교명령이 지상명령이라는 사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 명령은 예수께서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주신 명령이다. 피로 하신 명령이다. 주께서 피로하신 명령은 어떠한 박해나 위험에도 포기되거나 결코 타협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복하고 다스려라!’(창1:26-28)는 문화명령을 주신 것은 인간 타락 이전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 인류 문제의 핵심은 타락이요 죄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어떤 봉사나 사회참여도 본질적이거나 궁극적일 수 없다. 타락한 인간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선교명령을 주셨다. 선교명령이 수행되지 않는 문화명령은 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한다.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만이 유일한 소망이요 구원이시다. 예수 없는 사랑은 모든 종교에 내재되어 있다. 예수 없는 사랑은 결국 다원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문화명령은 거룩한 도구로 이해해야 하며 통전적 선교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 문화명령이 없는 선교명령은 홀로 역사한다. 그러나 선교명령이 없는 문화명령은 홀로 역사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예수 없는 사랑이 온전한 구원,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화명령은 선교명령에 종속되어야 한다. 가장 온전한 선교 접근은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을 위해 문화명령을 전인적 도구로 삼아 선교명령을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온전한 복음>이 아니라 <영원한 복음>에 집착해야 한다. 결국 영원한 복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성을 회복케 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할 것이다(계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