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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남산교회 &amp;gt; 커뮤니티 &amp;gt; 목회단상</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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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맡긴다는 것은</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사울과 다윗의 삶이 얽혀 빚어내는 갈등의 파노라마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br/>그러나 그 터널을 지나야 했던 당사자들에게는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br/>문득 이런 질문이 찾아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억울한 쪽은 다윗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신속하게 사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br/>십여 년이 넘도록 다윗을 쫓기는 도망자의 삶에 두셨을까?”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br/>하나님께서는 단 한순간에도 모든 상황을 끝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br/>사울의 광기로 피해를 본 이가 비단 다윗뿐이었겠습니까? <br/>거의 멸족당한 놉의 제사장 가문, 다윗과 함께 유랑했던 용사들과 그 가족들, <br/>그리고 사울의 수하에 있다가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군인들까지 헤아리면 그 상처는 한이 없습니다. <br/>그렇다면 이들은 단순히 ‘고래 싸움에 터진 새우 등’에 불과한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br/><br/>&nbsp; &nbsp;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개미 한 마리의 생명조차 그 손에 달려 있습니다. <br/>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은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대합니다. <br/>그 주권과 섭리 속에서,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다윗에게는 낮아짐을 배우는 ‘광야’가 필요했고, <br/>불순종의 죄에 빠진 사울에게는 돌이킬 ‘회개의 기회’가 필요했습니다. <br/>다윗에게 사울은 진정한 왕도를 빚어내는 훈련장이었고, 사울에게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거울이었습니다. <br/>그러므로 두 사람이 쫓고 쫓기며 보낸 긴 시간은 헛된 낭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두 사람 모두를 살리기 위한 생명의 시간이었습니다.<br/><br/>&nbsp; &nbsp;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습니다.<br/>“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br/>&nbsp;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br/>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 37:5–7). <br/>지금 깊은 수렁이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고뇌를 겪고 계십니까? <br/>그 유일한 정답은 상황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br/>그분은 우리의 지나온 과거를 아시고, 현재의 얽힌 갈등을 꿰뚫어 보시며, 마땅히 이르러야 할 가장 선한 미래의 결론을 이미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br/>이 세상에 우리의 진짜 아픔을 헤아려 온전한 답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란, <br/>그분의 손에 미래를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br/>그 끝에는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며, 마침내 모든 상처가 회복되는 은혜의 날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br/>&nbsp; 그러나 여호와께 맡기고 의지하며 오직 그분만 신뢰하는 현재는, 동시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이 요청됩니다. <br/>그 기다림의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지난날의 죄를 돌아보는 회개의 기회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더 깊은 은혜로 빚어지는 거룩한 훈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br/>결국 ‘맡긴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가장 안전한 손에 내 인생의 주도권을 온전히 양보하는 가장 적극적인 믿음의 고백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Wed, 23 Sep 2026 15:37: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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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기도가 말씀으로</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성경을 우리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는 곳곳에 사람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br/>특히 시편은 대부분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와 찬양입니다. 탄식과 회개, 감사와 찬양, 기쁨과 절망 등 인간의 다양한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br/>그럼에도 우리는 시편을 ‘사람의 말’이라고 하지 않고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br/>어떻게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요? 여기에 시편이 지닌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br/><br/>&nbsp; &nbsp;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행위이지만, 성경의 기도는 단순한 인간의 독백이 아닙니다. <br/>모든 기도에는 향하는 방향과 대상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달라도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br/>그리고 기도의 응답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들으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br/>그러므로 기도의 궁극적인 주체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br/><br/>&nbsp; &nbsp;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이유 중 첫 번째는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br/>시편의 기도자들은 먼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건지셨고, 보호하셨고, 인도하셨기에 다시 하나님을 부릅니다(시 40:1-5; 77:11-15; 116:3-9). <br/>그러므로 기도는 허공을 향해 던지는 독백이 아니라,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br/>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그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구원이 증언됩니다.<br/><br/><br/>&nbsp; &nbsp; 두 번째 이유는 기도가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의해 다듬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처음부터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은 아닙니다. <br/>그러나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의 기도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사랑을 구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알면 공의를 구하며, <br/>하나님의 뜻을 알면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게 됩니다(시 25:4-5; 27:11; 37:4-7; 86:11; 143:10). <br/>결국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이루어집니다. <br/><br/><br/>&nbsp; &nbsp;  본회퍼는 이러한 시편의 성격에 대해 『시편사색』에서 우리가 당장 기도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br/>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br/>하나님은 우리의 가난한 마음만으로 기도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부요함으로 우리의 기도를 채우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20쪽). <br/>시편의 놀라운 면은 분명 다윗의 기도이고, 아삽의 기도이며, 고라 자손의 기도인데, 그들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듣는 다는 것입니다. <br/>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br/><br/><br/>&nbsp; 오늘 우리의 기도도 그러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위에 서고, <br/>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의해 다듬어진다면 우리의 기도 역시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br/>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빌 2:13). <br/>그러므로 기도는 단순히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말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나는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br/>기도가 우리의 소원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름으로 ‘사람의 기도’가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거룩한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18 Sep 2026 17:40: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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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유가 있겠지?</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하나님의 뜻에 대해 의문을 품고 많은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한 형제 집사님이 계십니다. <br/>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신앙을 거부하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br/>늘 예배의 자리를 지키지만, 마음속을 맴도는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안타까움의 호소입니다. <br/>긴 세월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br/>하나님이 계시고 세상을 다스리신다면 왜 세상은 이렇게 혼란스러운가? <br/>왜 전쟁을 허용하셔서 수많은 아이들과 약자들이 죽어가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br/>왜 같은 질병을 앓고 동일하게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은 살아나고 한 사람은 죽는가? <br/>그렇다면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br/><br/>&nbsp; &nbsp;  이런 질문들은 쉽게 답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br/>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개 “하나님의 뜻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라는 말이 결론이라 합니다. <br/>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 못 할 사안에 대해 절대자의 ‘뜻’이라는 말만 붙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기에 <br/>이 형제님의 마음이 더 복잡해지고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함께 만나 대화를 나누노라면 늘 제자리걸음을 걷습니다.<br/><br/>&nbsp; &nbsp;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 형제 집사님의 사업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br/>지금 일하는 사업장을 7년째 잘 아는 분과 동업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br/>그분은 집사님보다 일곱 살 위이고, 무려 30년을 알고 지낸 분이었습니다. <br/>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같은 회사에서 서로 다른 직종으로 함께 일했고, <br/>사업을 시작한 이후에는 집사님은 기술적인 부분을 맡고 동업자는 행정적인 일을 주로 담당하며 지금까지 함께해 왔다고 합니다. <br/>그리고 동업을 하다 보면 때때로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생기고, 특히 금전적인 문제와 관련된 일이면 더욱 그렇다고 합니다. <br/>그런데 집사님이 한 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목사님,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었다면 우리는 벌써 결별했을 겁니다. <br/>오래 알고 지냈고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어도 ‘이유가 있겠지!’ 하고 넘어갑니다.”<br/><br/>&nbsp; &nbsp;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바로 그거네요.” 사람을 신뢰하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당장 이해하지 못해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br/>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섣불리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뢰가 있으면 이해보다 관계가 앞서가며 “내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br/>저 사람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입니다. <br/><br/>&nbsp; &nbsp;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갖는 것이 아니라, <br/>답을 알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br/>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면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허락하신 일들이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아도<br/>&nbsp;“이유가 있으실거야”, 분명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으실 거야”라고 신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br/>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세상 이치를 다 헤아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br/>30년 동안 함께 지낸 동업자를 신뢰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도 하나님과 사귐이 필요합니다. <br/>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실 때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막 3:14)였습니다. <br/>오늘도 말씀으로 주의 마음을 듣고, 기도로 그 마음에 이를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음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11 Sep 2026 16:47: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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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숨은 허물</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삶을 살아가노라면 참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br/>그중에는 본의 아니게 비방의 대상이 되는 곤혹스러운 순간도 있습니다. <br/>억울한 마음이 솟구칠 때도 있지만, 이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깨닫습니다. <br/>결국 우리가 온전히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임을 다시금 고백하게 됩니다. <br/>팀 켈러는 그의 저서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비우호적인 상황을 평온하게 이겨내기 위해 두 가지 확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br/>첫째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고통 겪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며, <br/>둘째는 그럼에도 그 고통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br/>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동시에 붙들 때, 우리는 어떤 상황도 올바르게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br/><br/>&nbsp; &nbsp;  작년의 일입니다. 교회 안에 저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br/>제가 담임 목회자로 청빙될 당시, 청빙위원회에서는 교회 내 사택 입주를 요청했으나 제가 이를 거부하고 외부 아파트를 요구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br/>또한 교회에서는 아반떼 차량을 제공하려 했으나 제가 굳이 쏘나타를 고집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br/>이 소식을 들은 몇몇 분들은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속히 진실을 밝히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br/>&nbsp;“하나님께서 다 아시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소문을 만들어낸 이들이 진정으로 진실을 알고자 했다면 제게 먼저 물었을 것입니다. <br/>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가공해 냈다는 것은, 진실보다 다른 목적이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br/><br/>&nbsp; &nbsp;  그 말들을 뒤로하고 조용히 묵상에 잠기니 몇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감사하다”였습니다. <br/>소문의 내용이 생각보다 험악하지 않아 내심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다음은 “다행이다”였습니다. <br/>비난거리를 일부러 창작해야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금 당장 비난받을 만한 실질적인 허물이 드러나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br/>마지막으로 가슴을 친 생각은 “들켰다”였습니다. 비록 소문 속의 일들을 입 밖으로 내거나 요구한 적은 없지만, <br/>제 마음 한구석에 그러한 인간적인 욕심과 안락함에 대한 갈망이 전혀 없다고 부인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br/>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입술을 빌려 제 속에 숨겨진 실체를 드러내신 것만 같아, “들켰다”는 자각조차 하나님이 주신 경책으로 여겨졌습니다.<br/><br/>&nbsp; &nbsp; 거짓 비방에 대해 정당성을 입증하려 애쓰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여겨졌습니다. <br/>하나님께서는 타인의 시선을 빌려 제 속의 ‘숨은 허물’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정결하게 처리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br/>그러니 엄밀히 말해 그 말들은 비방이 아니라, 제 내면의 ‘숨겨진 실제’였습니다. 교묘하게 포장되어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으나, <br/>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투명비닐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던 제 욕망의 편린이었던 셈입니다.<br/><br/>&nbsp; &nbsp; 팀 켈러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겪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지만 그 고통을 통해 이루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br/>“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 4:4)는 말씀을 되새기며 이 모든 상황을 아버지께 맡겨 드립니다. <br/>감춰진 인간적 욕망인 ‘숨은 허물’까지도 다루길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그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제게 들려왔음을 확신합니다. <br/>하나님의 깊은 뜻은 저의 입술의 모든 말뿐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묵상까지도 주님 앞에 기쁘게 받으실 만한 정결한 제물이 되는 것임을 다시 새기게 되었습니다(시 19:14).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11 Sep 2026 16:41:3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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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소유, 계획, 감정</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제 인생의 후반부를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한 시기마다 한 가지씩 집중적으로 훈련하시고 연단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br/>서른 살에 신학을 시작한 이후를 돌아보면, 한국에서의 3년과 캐나다에서의 9년, 모두 12년의 배움의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가장 깊이 다루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소유였습니다. <br/>그 시간은 물질관을 새롭게 빚으시는 기간이었습니다. 세상은 “가진 것이 있어야 공부할 수 있고, 모아 놓은 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br/>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걸어갈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채우신다는 사실을 삶으로 배우게 하셨습니다. <br/>공부라는 정적인 소명을 감당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한 번도 부족함 없이 은혜로 채우셨고, 그 시간은 소유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자라나는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br/><br/>&nbsp; &nbsp;  공부를 마친 후 2005년 한국으로 돌아와 주중에는 시간강사로, 주말에는 교육목사로 사역하며 한 가지 꿈을 품었습니다. <br/>신학교의 전임교수가 되어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그 꿈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br/>열심히 준비하고, 열심히 가르치며 평생 학문의 길을 걷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10년 동안 네 차례의 교수 임용에서 모두 실패했습니다. <br/>그 좌절과 실망, 혼란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더 이상 임용에 도전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br/>목회자와 성도들을 위한 성경 교육에 집중하며 ‘하임 바이블 아카데미’를 시작했습니다. <br/>그런데 5년 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르심이 찾아왔습니다. 한 번도 계획해 본 적 없던 담임목회의 길이었습니다. <br/>그제야 15년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제게 가르치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br/>“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br/>하나님은 제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훨씬 크고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br/><br/>&nbsp; &nbsp;  그리고 지금, 담임목회 7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계십니다. 바로 감정입니다. <br/>천 명이 넘는 성도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성향과 생각, 감정들을 품는 일입니다. <br/>그 다양함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br/>떼제 공동체의 한국인 수사 이한열은 『함께 사는 기적』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br/>저 역시 그 고백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적이라 하면 병이 낫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을 떠올립니다. <br/>그러나 어쩌면 더 큰 기적은 서로 다른 우리가 한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br/>그것은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선택할 때만 가능한 기적입니다.<br/><br/>&nbsp; &nbsp;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는 12년 동안은 소유를, 15년 동안은 계획을, 그리고 지금은 감정을 다루고 계십니다. <br/>물론 이 훈련이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br/>지금도 어느 날은 소유와 계획과 감정이 한꺼번에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언제 이 연단이 끝날까요? <br/>아마도 내 감정과 소유와 계획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날일 것입니다. <br/>생각해 보면 그 길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마음이 더 선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<br/>내 소유보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언제나 더 완전하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28 Aug 2026 15:59:0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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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인생의 한계</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1980년대 후반, 미국 아리조나주 오라클(Oracle)에서 하나의 거대한 실험이 이루어졌습니다. <br/>축구장 약 두 배 크기의 밀폐된 유리 공간에 지구의 생태계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바이오스피어 2(Biosphere 2)’ 프로젝트였습니다. <br/>이 실험은 지구와 완전히 분리된 공간에서도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진행되었습니다. <br/>내부에는 열대우림, 사바나, 초원, 사막, 맹그로브 습지, 산호초 바다는 물론 농경지와 인간 주거지까지 조성되어 지구 환경이 축소형으로 모방되었습니다. <br/>‘바이오스피어 2’라는 이름에는 지구를 ‘바이오스피어 1’으로 두고, 인간이 직접 만든 ‘작은 지구’를 구현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가 담겨 있었습니다.<br/><br/>&nbsp; &nbsp;  생태계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무렵인 1991년, 드디어 8명의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가 2년 동안의 고립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br/>그들은 생존을 위해 농사부터 물 재활용, 산소와 이산화탄소 순환, 동식물 관리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br/>처음에는 완벽한 자급자족이 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심각한 균열이 생겼습니다. <br/>입소 당시 21%로 지구와 동일했던 산소 농도가 약 16개월 만에 14%까지 급감한 것입니다. 원인을 파악한 결과, 뜻밖에도 범인은 토양 속 미생물들이었습니다. <br/>농사를 잘 짓기 위해 유기물이 풍부한 흙을 넣었는데, 그 속의 미생물들이 유기물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산소를 소비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했던 것입니다. <br/>식물이 공급하는 산소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결국 실험실 외부에서 산소를 강제로 주입해야만 했습니다.<br/><br/>&nbsp; &nbsp;  이 사건 하나만 보아도 지구의 생태계가 얼마나 정교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br/>아울러, 인간이 자연의 복잡한 메커니즘과 물질 순환을 인위적으로 완벽히 통제하고 모방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습니다. <br/>반대로 이 실험은 우리가 매일 누리는 지구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숨을 쉬기 위해 스스로 산소를 만들거나 정화하려고 애쓴 적이 없습니다. <br/>인간이 살아가기에 가장 적정한 산소 농도가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br/><br/>&nbsp; &nbsp;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감히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신 8:17)라며 큰소리치고,<br/>“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사 47:8; 습 2:15)라며 교만에 빠지곤 합니다. <br/>세상이 아무리 “내가 만들고, 관리하며, 통제한다. 나는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외칠지라도, 이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허언일 뿐입니다. <br/>아무리 막대한 부와 거대한 권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당장 호흡에 필요한 산소 하나조차 뜻대로 조정할 수 없는 연약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br/><br/>&nbsp; &nbsp;  우리가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처럼 자랑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이미 값없이 주어진 공기, 물, 토양, 미생물, 식물, 동물, 태양과 바람, <br/>그리고 계절이라는 거대한 은혜의 바탕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권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합니다. <br/>이제 우리의 고백은 “내가 이루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다”로, “내 능력이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다”로 <br/>그리고 “내 면류관이다”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라는 깊은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br/>이 진정한 고백은 오직 ‘인생의 한계’를 뼈저리게 깨달은 자만이 맛볼 수 있는 감격의 찬양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28 Aug 2026 15:54:5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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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인간이 저지르는 수많은 죄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아마도 교만일 것입니다. <br/>성경은 이 교만의 본질을 ‘하나님같이 되려는 마음’이라고 하고, 이를 원죄라고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br/>“하나님이 보시는 원죄는 하나님 없이 살아보려는 인간의 의식에서 시작되고, 인간은 점차 그런 상태에 익숙해진다.”(『오스왈드 챔버스의 제자도』). <br/>결국 교만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부터가 아닌 하나님 없이도 내 생각과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태도로부터 시작됩니다. <br/>그 결과는 혹독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머무는 곳이 낙원이라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삶은 결국 실낙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br/><br/>&nbsp; &nbsp;  창세기는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br/>그 회복의 길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 30:2, 50:19). <br/>이 두 외침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인간이 결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으며, 대신해서도 안 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br/>그리고 이 고백이 입술에만 머물지 않고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회복은 시작됩니다.<br/><br/>&nbsp; &nbsp; 먼저는 야곱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언니 레아와의 경쟁 속에서 절망하던 라헬은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br/>그렇지 않으면 죽겠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때 야곱은 분노하며 대답합니다. <br/>“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 30:2). <br/>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에 이 말 자체는 옳지만 문제는 야곱의 삶이 그 고백을 끝까지 따라가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br/>그는 여전히 자신의 꾀로 재산을 늘리려 했고, 라반과 경쟁하며 자신의 방법으로 미래를 만들어 가려 했습니다. <br/>라헬 역시 하나님을 기다리기보다 합환채에 기대어 경쟁에서 이기려 했습니다. 이렇게 입술로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br/>삶은 여전히 자신의 주권을 붙들 때 주변은 변하는 것이 없이, 또 다른 양육강식의 정글 같은 치열한 경쟁 세상이 펼쳐질 뿐입니다.&nbsp; <br/><br/>&nbsp; &nbsp;  반면 창세기 마지막인 요셉의 이야기에 이르면 같은 말이 전혀 다른 무게로 들립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은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합니다. <br/>그들은 사람을 보내 용서를 구하고, 직접 찾아와 엎드려 용서를 빕니다. 그때 요셉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br/>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 50:19). 이 말은 야곱의 말과 같지만, 그 깊이는 전혀 다릅니다. <br/>13년의 종살이와 감옥살이, 억울함과 배신의 시간을 지나며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을 삶으로 배웠습니다. <br/>그는 자신의 상처도, 억울함도, 복수할 권리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br/>그래서 그는 형들을 정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고 말하며 진심으로 그들을 위로합니다(창 50:21).<br/>야곱에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는 입술의 말이었지만, 요셉에게는 삶의 고백이었습니다. 신앙은 입술보다 삶에서 증명됩니다. <br/><br/>&nbsp; 창세기의 마지막에 요셉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 <br/>결국 창세기는 에덴을 잃은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돌보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끝을 맺습니다.<br/>하나님같이 되려는 곳에는 언제나 낙원의 상실이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곳에는 언제나 낙원의 회복이 시작됩니다. <br/>그리고 그 주권인정은 반드시 입술을 넘어 삶이 되어야만 에덴은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28 Aug 2026 15:51:3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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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복음으로 살라</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요한복음의 기록들은 단순한 이야기처럼 읽히지만, 그 안에는 깊고도 높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br/>베데스다 연못에서 일어난 사건 역시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북동쪽,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br/>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이곳은 두 개의 큰 저수조와 그 사이를 잇는 둑이 있었으며, 그 둑을 따라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br/>요한은 굳이 그 행각이 ‘다섯’이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건축 구조에 대한 설명일 수도 있겠지만, <br/>상징적으로는 유대인의 율법인 모세오경(토라)을 연상시킵니다. 만일 이 상징을 염두에 둔다면, <br/>베데스다는 율법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처소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공간으로 다가옵니다.<br/><br/>&nbsp; &nbsp;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믿음은 치열한 경쟁을 낳았습니다. <br/>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율법주의가 만들어 낸 왜곡된 구원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br/>율법은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의를 증명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br/>그 결과 공동체는 서로를 세우기보다 경쟁하고 정죄하는 곳이 되었고, 누군가는 언제나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br/>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38년 된 병자입니다. 38년이라는 기간은 우연한 숫자가 아닙니다. <br/>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순종한 후 광야에서 방황했던 38년을 강렬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br/>“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신 2:14). <br/>이는 율법을 받았지만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전적 무능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br/><br/>&nbsp; &nbsp;  병자에게는 연못이 있었지만 들어갈 힘이 없었습니다. 기준은 있었으나 능력이 없었고, 원함은 있었으나 행함이 없었습니다. <br/>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br/>병자가 먼저 예수님을 찾은 것도 아니며, 믿음을 증명하거나, 특별한 공로를 세운 것도 아닙니다.<br/>&nbsp;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회복의 길로 이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br/>“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br/>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과감하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br/><br/>&nbsp; &nbsp; &nbsp;  이 말씀은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누워 있던 인간에게 은혜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거룩한 초청입니다.<br/>&nbsp;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은혜는 율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기쁨으로 순종하게 합니다.<br/>억지로 지키던 계명이 사랑으로 살아내는 삶이 되고, 무거운 짐이었던 율법은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이 되며, 세상을 향한 희망의 빛이 됩니다.<br/><br/>&nbsp; &nbsp; &nbsp;  오늘도 우리에게는 저마다 내려놓지 못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실패의 자리, 상처의 자리, 자기 의의 자리, 율법주의의 자리입니다. <br/>예수님은 그 자리를 번쩍 들고 과감히 걸으라하십니다. 이제 그 자리는 더 이상 우리를 얽어매는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br/>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증거가 됩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그 자리에 붙들려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 자리를 들고 주님을 따라 걸어갑니다. <br/>율법 아래 눕던 사람이 은혜로 일어나 진리 안에서 걷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안식이며, 복음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07 Aug 2026 14:04:5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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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곳이 힘들다 느껴질 때</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서 있는 자리가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먼저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세 가지 경우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br/>첫째, 그곳이 하나님께서 머물게 하신 자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둘째, 있어야 할 자리이지만 아직 그 일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br/>셋째, 마침내 하나님께서 맡기신 참된 소명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br/><br/>&nbsp; &nbsp; 첫 번째 경우라면 미련을 두지 말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지혜입니다. <br/>때를 놓치면 평생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붙들고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br/>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경우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필요한 것은 탈출이 아니라 인내입니다. <br/>준비가 부족하다면 잠시 다른 곳에서 배우고 익힐 수는 있습니다. <br/>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과정입니다. <br/>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그 자리에 두신 것은 가장 적절한 때이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br/><br/>&nbsp; &nbsp;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참된 소명의 자리는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 일이 가치 있고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br/>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흘려야 하는 땀과 눈물, 헌신과 섬김, 낮아짐과 인내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br/>가치 있는 일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고,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자신을 비우는 과정이 함께합니다. <br/>농부의 삶을 떠올려 보십시오. 씨를 뿌리는 일은 결코 씨앗만 뿌리는 작업이 아닙니다. <br/>먼저 굳은 땅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br/>씨보다 더 빨리 자라는 잡초를 뽑아야 하고, 끊임없이 밭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<br/>렇게 땀 흘려 수고한다고 해서 풍성한 추수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br/>가뭄과 폭우, 우박과 병충해 같은 수많은 변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br/>결국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려 주시고, 바람과 햇빛, <br/>밤과 낮의 기온까지 가장 좋은 때에 허락하셔야만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br/><br/>&nbsp;  그러므로 추수는 농부의 수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농부의 성실한 땀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질 때 비로소 기쁨의 추수가 시작됩니다. <br/>그래서 수확은 단순한 성공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이 누리는 감사의 기쁨입니다. <br/>그래서 시편의 고백이 더욱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br/>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5-6).<br/><br/>&nbsp; &nbsp;  이 말씀은 우리의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약속합니다. <br/>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씨앗처럼 사용하셔서 마침내 기쁨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br/>특히 ‘반드시’라는 단어는 오늘의 눈물을 견디게 하는 가장 강력한 위로입니다. <br/>상한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 몸이 지칠 만큼 수고하며 흘리는 눈물,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며 드리는 간구의 눈물, <br/>아직 보이지 않는 열매를 믿고 미리 감사하는 눈물까지…. 이 모든 눈물이 모여 하나님 앞에 심겨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쁨의 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br/>상처를 견디고, 눈물을 흘리며, 오래 인내하는 시간이 있어야 진정 가치 있는 성취와 변화, 성숙의 열매가 맺힙니다. <br/>그러므로 지금 탄식과 눈물이 깊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눈물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으십니다. <br/>오늘의 눈물이 깊을수록 내일 하나님께서 안겨 주실 추수의 기쁨은 더욱 풍성할 것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07 Aug 2026 13:51:3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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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그 날'</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사람은 끊임없이 발전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br/>생존을 위한 기초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을 시작으로, 편리함을 넘어 풍요가 차고 넘치는 시대에 이르렀음에도 결코 그 속도를 늦추지 않습니다. <br/>천지창조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으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은 마땅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br/>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발전에는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으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그 위험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br/>&nbsp;“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br/>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사 3:1-3).<br/><br/>&nbsp; &nbsp;  이 말씀은 우리가 추구하는 맹목적인 발전의 위험성을 역력히 보여줍니다. <br/>여기서 반복되는 ‘의뢰와 의지’의 히브리어 원어는 ‘미쉔’, 즉 ‘지팡이’를 뜻합니다.<br/>&nbsp;가장 기본적인 생존 조건인 양식과 물에서부터 안전을 지켜주는 군사력, 사회를 지탱하는 정치·경제·종교 조직들이 촘촘하게 발달하며, <br/>어느새 그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삶의 ‘지팡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br/><br/>&nbsp; &nbsp;  이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없이도 기댈 곳이 있으니 능히 살아갈 수 있다는 교만이 자리 잡습니다. <br/>굳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페달만 밟으면 잘 굴러가는 자전거를 탄 것처럼, 완벽하게 독립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br/>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발전이 아니라, 본격적인 퇴보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지팡이를 의지하는 순간, <br/>사회의 온갖 병폐가 시작됩니다. 가진 양식의 격차가 벌어지며, 계급과 차별이 생겨나고, 공동체는 갈라지고 다툼은 격화됩니다. <br/>종국에는 서로를 짓밟고 빼앗는 치열한 전쟁터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br/><br/>&nbsp; &nbsp;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헛된 발전으로 무너져 가는 날이 아니라, 온전히 회복될 ‘그 날’을 그리워하십니다: “<br/>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br/>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br/>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사 4:2, 5-6).<br/><br/>&nbsp; &nbsp;  이사야서가 묘사하는 ‘그 날’은, 흡사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초막에 머물던 광야 시절로 돌아간 듯한 풍경입니다. <br/>하나님의 그리움은 바로 그 시절에 머물러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능력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갔던 때, <br/>화려한 겉치장이나 소유로 계급이 나뉘지 않던 때, 빼앗고 빼앗기는 다툼이 없던 그 시절 말입니다. 혹여 더 많이 거둔 ‘만나’라 할지라도 축적하지 않고, <br/>‘내일’을 책임지실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오늘’ 기꺼이 이웃과 나누던 시절입니다.<br/><br/>&nbsp; &nbsp;  그래서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람이 없는 세상, 오직 하나님만을 삶의 지팡이로 의지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br/>오늘 우리의 손에 쥐어진 헛된 지팡이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바로 &#039;그 날&#039;의 은혜를 사모하며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07 Aug 2026 13:46:0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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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기다린다는 것의 의미</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기다림’은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삶의 예술입니다. <br/>기약이 있는 기다림도 인내를 요하거늘, 기약 없는 기다림은 때로 영혼의 뼈를 마르게 하는 고역이 되곤 합니다. <br/>시편을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을 향해 거듭 토해내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탄식과 마주하게 됩니다<br/>(시 6:3; 13:1-2; 35:17; 74:10; 79:5; 80:4; 89:46; 90:13). <br/>그중 시편 13편은 시작부터 네 번이나 그 절박한 질문을 쏟아내며, 감출 수 없는 아픔을 보여줍니다.<br/><br/>&nbsp; &nbsp;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br/>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1-2)<br/><br/>&nbsp; &nbsp; &nbsp; 이 질문이 터져 나오는 자리에는 늘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br/>상황은 설명조차 사치일 만큼 고통의 극에 달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잊으신 듯, 혹은 버리신 듯, 혹은 철저히 무관심하신 듯 응답이 없으십니다. <br/>그 침묵의 시간 동안 우리는 아픔과 혼란을 고스란히 쏟아 부으며 호소합니다. <br/>어쩌면 그 탄식의 문장 하나하나마다 우리 인생의 무거운 시간들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br/>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절박함을 다 아심에도, 그토록 긴 침묵으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 걸까요?<br/><br/>&nbsp; &nbsp; &nbsp; 얼마 전,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 『타인은 나를 모른다』를 읽으며 ‘기다림’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보았습니다. <br/>작가는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 ‘보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br/>아침마다 보타가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비며 “내 밥은 언제 줄 건가요?”라고 간청할 때, <br/>이미 최상급 식사가 준비되어 있음에도 그는 의도적으로 식사 시간을 조금 늦춘다고 했습니다. <br/>그 간절한 기다림과 식사를 향한 갈망이 곧 고양이의 ‘심신 건강의 비결’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br/>보타는 실제로 보통 고양이보다 두 배나 긴 25년이라는 시간을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br/><br/>&nbsp; &nbsp; &nbsp; 고양이에게 ‘기다림’이 생명의 활력이듯,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해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묻는 부르짖음은 영적 생명력을 지키는 귀한 방편입니다. <br/>낙심과 회의가 파도처럼 밀려올 때, 침묵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옷자락에 마음을 비비며 모든 감정을 쏟아내는 것, <br/>그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영적 야성’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소망을 품었다가도 금세 두려움에 빠지고, 열심을 내다가도 회의감에 무너지기도 하지만, <br/>시편의 기자들이 끝내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 침묵 너머에 분명히 준비되어 있는 주님의 ‘인자하신 사랑(헤세드)’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시 13:5; 17:7; 25:6; 31:7, 등).<br/><br/>&nbsp; &nbsp;  그러니 우리가 신앙의 여정에서 겪는 낙심과 회의, 그리고 희망의 교차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br/>그것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주님, 제 영혼의 양식을 언제 주실 건가요?”라고 간절히 몸을 비비며 요구하는, 지극히 건강하고 역동적인 영적 반응입니다. <br/>기억하십시오. 그 탄식의 끝에 찾아올 응답은 우리의 내면을 이전보다 더 깊고, 단단하며, 거룩하게 빚어낼 것입니다. <br/>지금 당신이 지나고 있는, 쉽지 않은 이 ‘기다림의 시간’은 훗날 당신의 삶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건강하게 완성될 또 하나의 시편이 될 것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07 Aug 2026 13:43:1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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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벼랑끝에서 피어나는 소망</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긴 시간 암 투병 중인 자매님과 전화 통화를 나누었습니다.<br/>&nbsp;40차라는 항암 횟수를 듣는 순간, 마음이 먹먹해 짐을 느낍니다. <br/>2~3주 간격이던 항암은 이제 매주 진행되고 있고, 수차례 약을 바꿔보았지만, <br/>현재는 부작용으로 인해 치료를 잠시 멈추고 몸이 다시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합니다. <br/>무슨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까요. 어떤 언어도 이 절박한 상황 앞에서는 그저 사치스럽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br/><br/>&nbsp; &nbsp; 매일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아요.” 자매님이 내뱉은 그 한 마디가 현재의 고통을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br/>한 발만 더 내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를 매일 마주하는 삶. <br/>그 속에서 놀라운 구원의 기적이 펼쳐져 희망의 빛을 던져주던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과 괴리되어 자신에게는 반비례 정도로 밖에는 안 다가오고, <br/>가슴 속엔 하나님을 향한 수많은 질문이 가득하다는 고백을 들으며 그저 묵묵히 함께 기도를 올릴 뿐이었습니다. <br/>하나님을 향한 의문과 질문은 곧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기에 해야 할 것은 그 깊은 섭리에 맡기는 기도뿐이기 때문입니다. <br/>인간의 무능함을 절감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허락된 최고의 선물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br/><br/>&nbsp; &nbsp; &nbsp;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서로의 마음속에 귀한 위로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br/>지금 자매님이 겪는 고통은 단순한 투병의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매님께 가장 적합한 ‘치료’를 찾아가시는 중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br/>의사 분들이 항암제를 바꾸며 최적의 대안을 찾듯, 우리 하나님께서도 자매님의 삶에 꼭 맞는 은혜와 회복의 길을 열어가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br/>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의사 분들이 알맞은 약과 치료방법을 찾아가며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지고, 자매님을 통해 또 하나의 치료의 길이 열린다면 <br/>그와 동일한 고통 가운데 거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것을 느끼게 하십니다. <br/><br/>&nbsp; &nbsp; 이를 통해 자매님을 향해 ‘선구자’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새로운 약과 치료방법을 찾아가는 데 길잡이가 되는 ‘선구자’인 것이지요. <br/>이렇게 새로운 길을 먼저 걷는 선구자의 길은 늘 외롭고 괴롭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반복적인 시행착오를 몸으로 체험하며 가야하니 힘겨운 길입니다. <br/>스스로는 결코 선택하고 싶지 않은 길이 분명합니다. <br/>그러나 그 길이 열리고 나면, 자매님의 그 눈물겨운 여정이 그와 동일한 고통 속에 거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이정표가 되어 다시 살 힘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br/><br/>&nbsp; &nbsp;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고통의 시간을 통해 잃어버린 것 같은 시간들을 더 큰 은혜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br/>남편분과 함께 멈춰 버린 듯한 지난 3년의 시간을, 그리고 사춘기 자녀들과 나누지 못한 일상의 조각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축복으로 가득 채우실 것을 믿습니다. <br/>무엇보다 지금 자매님을 짓누르는 이 고통스러운 ‘트라우마’가, 언젠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 아래에서 찬란한 ‘추억’과 ‘간증’으로 뒤바뀔 날이 올 것을 고대합니다. <br/><br/>&nbsp; &nbsp; 벼랑 끝은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한계 상황이지만, 역설적으로 믿음이 가장 높이 비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br/>다니엘의 사자 굴이 그랬고, 풀무불 속의 세 친구가 그러했습니다. 그 벼랑 끝에 하나님이 함께 계실 때, 수많은 질문은 확신이 되고, <br/>반비례처럼 잠시 숨어 있던 하나님의 말씀은 정비례를 넘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삶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지금 벼랑 끝에 선 모든 분들에게 주 뜻 이루어지이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hu, 16 Jul 2026 13:53:0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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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유일한 중보자</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중보자(仲保者)’라는 단어는 헬라어 ‘메시테스(μησίτης)’에서 유래했습니다. <br/>이는 ‘중간’을 뜻하는 ‘메소스(μέσος)’에서 파생된 말로, “두 당사자 사이의 중간에 서서 관계를 회복하고 평화를 이루는 자”를 의미합니다. <br/>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선언합니다.<br/>다른 어떤 중보자도 불허하는 듯한 이 진리가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br/><br/>&nbsp; &nbsp; 인간은 그 본성상 온전한 중재자가 되기에 한계를 지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할 때, 우리는 종종 ‘나’라는 필터를 거치게 됩니다. <br/>상대에 대한 개인적인 선입견, 관계의 친밀도, 혹은 감정적 호불호가 우리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br/>탐탁지 않은 이의 말은 곡해하여 전달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은 실제보다 더 좋게 포장하기도 합니다. <br/>우리 마음의 ‘팔’이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굽기에, 인간은 서로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늘 실패할 위험을 안고 살아갑니다. <br/>이는 각 사람을 바라보는 감정선이 다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br/>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가장 바르게 증거하셨고,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가장 온전하게 올리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br/><br/>&nbsp; &nbsp; 예수님은 사람들의 악의적인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<br/>&nbsp;“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 20:28)임을 전하시며 <br/>오직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세상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지를 삶으로 증명하셨습니다. <br/>그리고 이 사명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기 위해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쏟아 부으시며<br/>&nbsp;“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자신의 모든 감정, 소유, 계획, 몸까지도 모조리 하나님의 뜻에 갈아 넣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 전하셨습니다. <br/>또한 사람들이 채찍으로 치며, 못 박고, 창으로 찔러 잔인하게 죽이는 그 고통과 멸시의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를 향해 <br/>“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부르짖으며 <br/>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에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도록 끝까지 우리 인생을 위해 중재하심으로 막힌 담을 완전히 허무셨습니다. <br/>그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비로소 화해가 이루어지며, 구원의 역사가 펼쳐진 것입니다.<br/><br/>&nbsp;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br/>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통로이심을 잊지 않되, <br/>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주님께로 연결하는 ‘작은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br/>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앞세우는 대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투명하게 전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br/>이를 위해서 갈등의 현장에서, 소외된 이웃의 곁에서, 우리의 사사로운 선입견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br/>타인을 향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중재할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br/>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작은 중보자’로서 오늘을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03 Jul 2026 16:15: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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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카리스마 되찾기</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카리스마(Charisma)’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nbsp; <br/>국어사전은 이 단어를 ‘많은 사람을 휘어잡거나 복종하게 하는 능력’, ‘대중을 압도하는 초인간적인 힘’이라고 설명합니다. <br/>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야 ‘기독교의 신이 사랑으로 베푸는 은총’이라는 뜻이 소개됩니다. <br/>오늘날 우리는 대개 앞의 두 가지 의미만을 떠올립니다. <br/>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카리스마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강한 능력으로 주변을 일사불란하게 이끄는 리더십이나, <br/>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br/><br/>&nbsp; &nbsp;  하지만 호주 맥쿼리 대학교의 존 포츠 교수는 그의 저서 『카리스마의 역사』를 통해 이 단어의 숨겨진 뿌리를 추적합니다. <br/>그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중을 장악하는 능력’은 이 단어의 본래 의미가 아닙니다. <br/>카리스마의 어원은 오히려 사전의 마지막 구석에 적힌, ‘하나님이 사랑으로 베푸시는 은총’이라는 뜻에 훨씬 가깝습니다. <br/>본질보다는 세상의 필요에 의해 파생된 의미가 더 널리 퍼져버린 셈입니다. <br/>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카리스마의 본래 의미를 회복해야 할 이유가 생겨납니다.<br/><br/>&nbsp; &nbsp;  포츠 교수는 수백 권의 서적과 자료를 참고해서 이 단어가 약 2천 년 전 사도 바울에 의해 처음 사용된 용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br/>당시 헬라 세계에서 쓰던 말이 아니라,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특별한 단어였던 것입니다. <br/>신약성경에 총 17번 등장하는데 그중 16번이 바울서신에, 1번이 베드로전서에 나옵니다. <br/>이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서 주로 &#039;은사&#039;라고 번역되지만, 그 의미는 단순히 개인의 재능이나 능력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br/><br/>&nbsp; &nbsp; 카리스마는 ‘은혜’를 뜻하는 헬라어 ‘카리스(χάρις)’에서 왔습니다. 즉, 카리스마는 본질적으로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br/>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이 개념을 두 가지의 만남으로 깊이 있게 풀어냅니다. 그에게 카리스마란, <br/>첫째로 죄로 인해 정죄 받을 수밖에 없던 인간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그 자체이며(롬 5:16), <br/>나아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롬 6:23)이라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선언합니다. <br/>세상은 카리스마를 사람의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가장 위대한 카리스마는, <br/>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br/>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이 받은 십자가의 죄 사함과 구원, <br/>그로 인한 영생,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도가 이미 소유한 가장 고귀한 은혜의 카리스마라는 것입니다.<br/><br/>&nbsp; &nbsp; &nbsp;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선물인 카리스마를 받은 이들에게 예언, 섬김, 가르침, 권면, 구제, 다스림, 긍휼과 같은 또 다른 카리스마(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롬 12:6-8).&nbsp; <br/>그 목적은 자신을 높여 세상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로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세상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br/>결국 카리스마는 자신을 드러내는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도구’입니다.<br/>이 두 가지 ‘은혜의 카리스마’인 주님의 십자가와 ‘섬김의 카리스마’인 우리의 십자가가 만날 때 비로소 교회와 세상을 살리는 ‘진정한 카리스마’가 됩니다.&nbsp; <br/><br/>&nbsp; &nbsp;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말하는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아닙니다. <br/>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로서의 카리스마를 되찾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다시 깊이 붙들고, <br/>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를 통해 기쁘게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 감추어진 십자가의 삶이라는 참된 카리스마의 의미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Wed, 01 Jul 2026 17:35: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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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십자가의 기적</title>
<link>https://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베드로전서만큼 주님의 십자가를 삶의 실천으로 생생하게 풀어낸 서신이 있을까요? 베드로가 전하는 십자가의 깊이는 남다릅니다. <br/>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한때 베드로가 그 십자가를 극렬하게 거부했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br/><br/>&nbsp; &nbsp;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br/>&nbsp;“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자신의 세상적 기대를 투영한 거부권 행사였고, <br/>그 결과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주님의 엄중한 꾸짖음이었습니다. 이후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br/>그는 칼을 뽑아 상대의 귀를 자르며 무력으로 주님을 지키려 했습니다. <br/>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는 뼈아픈 경고뿐이었습니다(마 26:52). <br/>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주님께서 정치적 역사를 일으키시길 기대했습니다. <br/>심문받으시는 곳까지 몰래 따라갔지만, 조롱과 매질 앞에서도 침묵하시는 주님의 ‘무능’을 목격하자 <br/>결국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마 26:69-75). 이렇게 십자가라면 치를 떨며 거부했고, <br/>무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려 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br/><br/>&nbsp; &nbsp;  그러나 베드로는 변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는 이제 교회 공동체를 향해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br/>“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br/>그가 강조하는 삶의 방식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발자취에서 기인합니다:<br/>“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br/>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2-23). <br/><br/>&nbsp; &nbsp; 이제 베드로는 매사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성도의 길임을 선포합니다. <br/>더 나아가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통로임을 역설합니다: <br/>“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br/>베드로는 이렇게 자신의 방법을 내려놓고 오직 주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증언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br/>그는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만이 갈라진 공동체를 연합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br/>그 구체적인 실천은 세상 속에서(벧전 2:12-17),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2:18-25), 부부 사이에서(3:1-7), <br/>그리고 형제자매의 공동체 안에서(3:8-12) 매일같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br/><br/>&nbsp; &nbsp; &nbsp; 한때 기적을 기대하며 주님을 따라다녔던 베드로가, 이제는 그 생의 마지막에 ‘십자가의 기적’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br/>이것이야말로 진짜 기적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압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룰 수 있는 길임을 말입니다. <br/>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만이 우리 목자장이 다시 오실 때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을 얻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벧전 5:4).<br/>&nbsp;주님이 행하신 과거의 십자가, 우리가 매일 지고 가는 현재의 십자가,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미래의 십자가의 영광, <br/>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품고 있는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기적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Wed, 01 Jul 2026 17:26:3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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