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중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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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36회 작성일Date 26-07-03 16:15본문
‘중보자(仲保者)’라는 단어는 헬라어 ‘메시테스(μησίτης)’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는 ‘중간’을 뜻하는 ‘메소스(μέσος)’에서 파생된 말로, “두 당사자 사이의 중간에 서서 관계를 회복하고 평화를 이루는 자”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선언합니다.
다른 어떤 중보자도 불허하는 듯한 이 진리가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온전한 중재자가 되기에 한계를 지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할 때, 우리는 종종 ‘나’라는 필터를 거치게 됩니다.
상대에 대한 개인적인 선입견, 관계의 친밀도, 혹은 감정적 호불호가 우리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탐탁지 않은 이의 말은 곡해하여 전달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은 실제보다 더 좋게 포장하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의 ‘팔’이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굽기에, 인간은 서로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늘 실패할 위험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는 각 사람을 바라보는 감정선이 다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가장 바르게 증거하셨고,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가장 온전하게 올리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악의적인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 20:28)임을 전하시며
오직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세상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지를 삶으로 증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기 위해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쏟아 부으시며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자신의 모든 감정, 소유, 계획, 몸까지도 모조리 하나님의 뜻에 갈아 넣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 전하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채찍으로 치며, 못 박고, 창으로 찔러 잔인하게 죽이는 그 고통과 멸시의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부르짖으며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에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도록 끝까지 우리 인생을 위해 중재하심으로 막힌 담을 완전히 허무셨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비로소 화해가 이루어지며, 구원의 역사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통로이심을 잊지 않되,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주님께로 연결하는 ‘작은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앞세우는 대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투명하게 전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갈등의 현장에서, 소외된 이웃의 곁에서, 우리의 사사로운 선입견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타인을 향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중재할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작은 중보자’로서 오늘을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
이는 ‘중간’을 뜻하는 ‘메소스(μέσος)’에서 파생된 말로, “두 당사자 사이의 중간에 서서 관계를 회복하고 평화를 이루는 자”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선언합니다.
다른 어떤 중보자도 불허하는 듯한 이 진리가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온전한 중재자가 되기에 한계를 지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할 때, 우리는 종종 ‘나’라는 필터를 거치게 됩니다.
상대에 대한 개인적인 선입견, 관계의 친밀도, 혹은 감정적 호불호가 우리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탐탁지 않은 이의 말은 곡해하여 전달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은 실제보다 더 좋게 포장하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의 ‘팔’이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굽기에, 인간은 서로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늘 실패할 위험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는 각 사람을 바라보는 감정선이 다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가장 바르게 증거하셨고,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가장 온전하게 올리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악의적인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 20:28)임을 전하시며
오직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세상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지를 삶으로 증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기 위해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쏟아 부으시며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자신의 모든 감정, 소유, 계획, 몸까지도 모조리 하나님의 뜻에 갈아 넣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 전하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채찍으로 치며, 못 박고, 창으로 찔러 잔인하게 죽이는 그 고통과 멸시의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부르짖으며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에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도록 끝까지 우리 인생을 위해 중재하심으로 막힌 담을 완전히 허무셨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비로소 화해가 이루어지며, 구원의 역사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통로이심을 잊지 않되,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주님께로 연결하는 ‘작은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앞세우는 대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투명하게 전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갈등의 현장에서, 소외된 이웃의 곁에서, 우리의 사사로운 선입견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타인을 향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중재할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작은 중보자’로서 오늘을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