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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전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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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409회 작성일Date 21-07-0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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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읽노라면 내용에서 서로 충돌이 빚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특히 그것이 구원에 관한 내용이라면 상당히 심각한 부딪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이 구절을 사용해서 구원을 말 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저 구절을 인용해서 구원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용하는 구절에 따라 구원의 정의가 달라진다면 그것처럼 심각한 일이 없습니다. 특히나 그 구절들이 모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첫 번째 구절은 예수님께서 산상순훈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할 것이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라가라”고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마 7:21-23). 여기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감사와 행함이 함께 연결되어야 함이 강조됩니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며, 죽은 믿음”(약 2:20, 26)이라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믿음의 확신은 자연스레 행함으로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러한 말씀에 의문을 갖게 합니다. 바로 십자가 위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눅 23:43). 아무리 돌아보아도 이 강도는 예수님을 마지막 순간에 믿은 것 외에는 한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선언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씀에 대한 구체적 예가 될 것입니다(롬 3:28). 이로 인해 우리는 지금도 임종을 눈앞에 둔 어떤 사람이든지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영생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그 약속을 믿고 주님을 고백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 두 내용을 비교하면 흡사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먼저 된 자가 왜 나중 될까요? 이유는 한 가지일 것입니다. 그 구원의 놀라운 기쁨을 상실한 삶 때문일 것입니다. 그 예를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집주인이 포도원 품꾼을 구하려 이른 아침에 나가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데려오고, 또 제 삼시(오전 9시)에 나가 데려오고, 또 제 육시(정오), 구시(오후 3시) 그리고 십일 시(오후 5시)에도 데려와서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십일 시에 온 품꾼부터 삯을 지불하는데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고 먼저 온 사람들은 더 받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고 원망합니다. 그 이유는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자신들을 똑같이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마 20:1-16). 우리는 구원의 기쁨으로 먼저 초대받은 것에 대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수고와 더위를 견딘 것이라고 자랑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랑이 아니라 더 큰 감사임을 잊은 것입니다. 이같이 놀랍고, 큰 구원으로 인한 삶의 기쁨과 감격을 임종직전에 가서야 주를 믿은 사람들은 평생 맛보지도 못하고, 누려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주의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삶을 이끌어가는 그 영광스러운 감격이 무엇인지를 고작 임종 직전에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평생을 헛된 삶을 살다가 마침내 찾은 삶의 구원자 예수님을 향한 몇 날, 몇 시간의 사랑이 평생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사람의 사랑보다 더 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이유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