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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와 걱정이 이끄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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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236회 작성일Date 21-04-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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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염려와 걱정 한 번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길이니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염려 없이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과거의 사건들이 발목을 잡지 않을까, 현재와 같은 각박한 세상 속에서 잘 생존할 수 있을까, 평탄할지, 아닐지 모를 불투명한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그리고 유약해 보이기만 하는 자식들 또한 앞가림 잘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와 같은 수많은 근심, 걱정들이 뒤얽혀 머릿속이 복잡하게 혼돈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며 하는 걱정에 대하여 어니 젤린스키라는 사람은 그의 책 ‘모르고 사는 즐거움’에서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걱정하는 것의 40% 정도는 결코 현실로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상상으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30% 정도는 이미 일어난 것에 대한 것이며, 22% 정도는 굳이 염려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나머지 8% 중에 4% 정도는 우리가 능히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고, 마지막 4% 정도는 우리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 4%를 뺀 96%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4%도 결국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니 걱정이나, 염려가 무의미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염려와 걱정이 우리 삶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며, 단순히 상념 정도로 끝나는 것이라면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금 시간만 낭비하는 셈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염려와 걱정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에 잠식될 때 그로 인해 발생 되는 결과가 치명적일 때가 많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염려와 걱정은 바르게 처리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두려움을 유발시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우리 삶의 경로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기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지고의 법을 전해주시는 산상수훈을 전하실 때 중요한 선택의 기로 앞에서 염려하지 말 것을 강조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 이것이 왜 그렇게도 중요할까요? 여기서 ‘염려하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메림나오’로 ‘분리되다, 나뉘다’라는 뜻을 가진 ‘메리조’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염려는 곧 생각과 시선이 두 갈래 이상으로 갈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의 출발선을 살펴보면 그 갈라짐이 어떤 의미인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염려는 두려움을 낳고, 그 두려움은 점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의지를 두는 쪽으로 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그 한계가 너무도 뚜렷합니다. 그 양과 질이 눈에 다 들어오고, 저울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양과 질의 경중에 따라 염려와 걱정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가중된다는 것입니다. 적으면 어떻게 더 모을까를 염려해야 하며, 많으면 어떻게 잘 지켜낼까를 걱정하게 합니다. 이처럼 ‘생활의 염려’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종말의 때를 온전히 살아갈 수 없게 만들 수 있습니다(눅 21:34). 이 염려의 해결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갈라진 시선을 한 곳으로 모아 우리가 염려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다 아시고, 이미 계획을 세워놓으신 하늘 아버지께로 향하는 것입니다(마 6:32). 만유의 주되시는 하나님만이 완전한 답이십니다.
김재구 목사